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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Feb 20. 2024

장례는 유족을 위한 절차가 아니다

나는 어린 상주가 되었고, 조문객들이 남긴 말들은 어지럽고 무책임했다

병원은 내게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픔에 잠길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또 정말 마지막으로 몇 개의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나왔다. 종이 몇 장으로 이제 공식적으로 아빠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서류를 하고 나오니 경찰이 와 있었다. 내게 아빠의 사인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었다. 나는 응급실까지 아빠와 동행했다 사라진 남자를 떠올렸다. 


"당시 동행하셨던 분이 낙상이라고 했어요. 그분은 지금 연락이 안 돼요..."

"교통사고예요."


뒤늦게 도착하신 외가 삼촌들이 날 보고 복잡한 표정을 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교통사고예요. 교통사고라고. 벼락같은 소식에 어버버 하는데, 경찰이 교통사고사실원을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Y시 경찰서 소관으로 이미 조사가 시작되었고, 유족이 확인해 주면 사망 진단서에도 사망 원인이 교통사고로 선택될 것이라고.


"모르겠어요. 낙상이라고 했는데. 저도 아무것도 몰라서......"


나는 백치처럼 모른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내가 경위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도,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었다. 결국 사망 원인은 미상으로 기록되었다.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했다. 교통사고라니. 대체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공포가 슬픔을 누르고 나를 조였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명백한 재난의 시작이었다.




가족들이 내게 장례를 어디서 치르겠냐고 물었다. 아빠가 눈을 감은 H대 병원 내 장례식장에서 치를지, 다른 장례식장으로 이동할지 결정해야 했다. H대 근처는 연고가 없다. 큰삼촌께서 아빠는 Y시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이니 Y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조문객들이 오가기 좋을 것이며, 또 마침 큰삼촌의 지인이 거기서 장례식장을 운영한다고 하셨다. Y시는 내가 10살부터 살던 곳이고 장례식장의 위치는 우리가 예전에 살던 곳 바로 옆 동네였다. 엄마가 그러자고 했다. 엄마는 당연하게도, 매우 불안해 보였다. 그곳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많았던 동네는 아니었어서 아빠를 보내줄 장소로 선택하기 마음이 불편했지만, 결국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아빠를 보내 주기로 했다.

 

나는 땀 흘리며 뛰어가 사 왔던 기저귀를 그대로 환불했다. 이제 필요 없어져서요. 원무처에 수납도 하러 갔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뇌에서 호르몬을 분비한다던데, 충격적인 소식을 연달아 듣고 나니 감정이 거세된 듯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공기는 맑았고 하늘은 청명했다. 무엇보다 시리게 추웠다. 세상이 움직이고 돌아가는 게 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계단에 반쯤 누웠다가, 원무과에서의 지난한 과정을 예의 바르게 대처하다 보면 이게 비현실이라 내가 이상할 만큼 침착하게 구는 건지 아니면 사실 내가 싸이코패스인건지 고민하게 됐다.




무슨 정신으로 장례식장까지 이동했는지 모르겠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이사 전 우리도 자주 다니던 길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게 있었던 장례식장이었다. 낙후된 동네의 초라한 장례식장. 나는 아빠의 취향을 안다. 아빠는 물건 하나를 하도 허접한 것을 사는 법이 없었다. 늘 크고 독보적인 것, 유서와 명식이 있는 것을 선호했다.


아빠가 안 좋아할 것 같다.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식장 안에 들어가서부터는 계속 돈이었다. 마침 아빠의 지갑 안에 있던 증명사진을 꺼내 드리고 클리어 파일을 건네받아 어떤 패키지로 진행할지를 선택했다. 옆에 사촌 오빠인 H오빠가 꼭 붙어서 나를 도와주었다. 오빠는 나와 엄마가 동시에 믿는 사람이다. 오빠는 침착하게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것들과 오빠가 도와줄 것들을 말해주었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것들 중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을 텐데 오빠가 설명해 줄 거고, 그럼 나와 엄마가 의논해 선택하면 된다고 했다. 고마웠다. 패키지를 선택하고 이것저것 추가로 결제하려는데 아빠의 지갑 속 카드가 먹히질 않았다. 법인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내 사비로 식장 비용을 결제했다.


이제 아빠의 주변인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려야 했고, 상주로서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아빠는 법인 대표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가 4000개를 웃돌았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시도하는 방법은 돈을 지불하고도 모두 실패해서, 여러 고배를 마시다 결국 그 번호들을 모두 내 휴대폰으로 옮기고 특수 서비스에 맡겼다. 4000명 중에는 '?'처럼 이름으로 저장되지 않은 번호들도 있었고, 국회의원도 있었지만 다분히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체 메시지가 전송되자 내 번호로 미친 듯이 전화가 빗발쳤다. 아는 사람, 잘 알지 못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 중요한 사람, 별 상관없는 사람, 이상한 사람. 아빠의 지인 대부분은 이것을 황당한 장난전화 내지는 보이스피싱으로 오해했다.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 황당한 죽음 앞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물었다.


'대체 어쩌다가요?'


그러니까요.




잠들기 직전에 겨우 잠옷만 갈아입고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 샤워를 해야 했다. 사촌언니가 사다 준 용품들로 샤워를 마치고 장례식장에서 받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누가 상주를 할 것인지를 두고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가벼운 논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손주 중 가장 편애하셨지만, 전형적인 옛날 분이셔서 상주는 남자인 내 사촌동생이 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 하셨다. 엄마는 그 말에 당연히 OO가 상주다, 우리에게 자식이라고 하나 밖에 없는데, 하며 노여워했다. 나는 어차피 누가 뭐라든 별 신경 안 쓰고 당연히 상주 노릇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그것에 대해 생각도 서운함도 없었다. 다만 몇 년 만에 보는듯한 사촌동생이 어쩔 줄 몰라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느껴졌다. 아빠는 늘 내 사촌동생들과 내가 가깝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소원한 채로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조문의 형태는 다양하다. 문자로 조의를 표시하는 사람들, 부고 소식에 그저 침묵하는 사람들, 말없이 부조만 하는 사람들, 있는지 모르게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조문객도 있고, 시끄럽게 소리를 높이는 진상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애도하는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소란스러운 조문이 결코 고인과의 관계의 깊이나 그 사람이 생전 고인에게 얼마나 의미 있었는지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조문객은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나는 상복을 입고 제단 앞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앉아있었다. 애들은 나를 부르지도 못하고 그걸 보고 있었던 것 같다. OO야, 친구들 온 것 같은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애들이 어쩔 줄 모르며 서 있었다. 한 명씩 차례대로 껴안았다. 눈물이 났다. 얻어맞은 듯 이제야 무언가 실감이 났다. 


"뭐야, 엄청 빨리 왔네. 너희가 제일 먼저 왔어."


착한 친구들. 친구들은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나는 괜히 웃으며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친구들 얼굴을 보니 반갑고,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껄끄러웠다. 엄마도 차례대로 친구들을 안아주면서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는 울먹였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된다. 나는 일부러 친구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조문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먼저 아빠의 회사 직원분들. 중년의 남자 직원분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내 또래의 여성분도 계셨다. 직원들은 서로 데면데면해 보이기도 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충격과 동시에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개수나 규모, 구조 등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날 조문 온 직원들은 아빠가 대표로 있는 서로 다른 3개의 법인 및 개인사업자 회사에서 근무하던 직원분들이었다. 이미 퇴사를 했다가 연락을 받고 왔다는 30대 초중반 가량의 여자분은 내 손을 잡고 아빠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우셨다. 정말 힘들 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정말 좋은 분이셨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회사 관련 처리가 쉽지 않을 거라며 안타까워하셨다. 회사 관계자들은 내가 오갈 때마다 하던 대화를 멈추시다, 또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회사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내 물음에는 긴 대화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고,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서로 다른 사람들, 때때로는 서로를 가리키며 저 자를 조심하라고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만 감지되었다. 나는 아빠가 몸 담고 있던 건설, 부동산 업계는 물론 매도/매수, 법인/개인 사업자의 개념도 몰랐다. 대학에서는 남들 다 하는 상경계 복전에는 눈도 두지 않고 순수 학문에 열중했었다. 그런 것들은 다 아빠에게 맡겨두면 될 줄 알았다. 


Y시 공인중개사 모임 등 아빠가 알고 지내던 동료 및 지인들도 도착했다. 명함을 수십 개는 받은 것 같았다. 다들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그게 빈말인지 그리고 누가 정말 아빠와 가까웠던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중에는 응급실에서 자취를 감춘 문제의 동행자를 태워 간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관련하여 특별한 언급 없이 여러 사람들에 묻혀 조문을 하곤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한꺼번에 여러 명의 조문을 받을 때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이 왔다가 간 줄도 몰랐다. 이쯤 되면 도의라는 개념은 무슨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친가, 외가 가족들도 도착했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쭉 경기도에서 살아서 지방에 있는 친가보다 대부분 수도권에 거주 중인 외가 식구들과 훨씬 가까운 편이었다. 아빠는 삼 형제 중 장남이고 엄마는 구 남매 중 막내 격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또래가 많은 외가에서 마음이 훨씬 편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아빠는 친가와 감정이 안 좋았다. 직계도 그렇지만 할머니의 동생들, 즉 아빠의 삼촌들과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먼 친가 어른분들 중에는 마지막으로 뵌 지 10년이 넘은 분들도 계셨다. 나는 아빠의 동생인 작은 아빠나 삼촌을 제외한 먼 친가 분들이 오시면 긴장했고, 외가 사람들이 도착하면 족족 눈물을 쏟았다.


아빠의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 사이에는 단순히 슬픔으로 정리되지 않는 묘하고 불편한 기운이 흘렀다. OO씨, 회사 경리와 발인이 끝나자마자 얘기를 해 둬야 해요. 우선 법인 카드와 통장을 막아 두라고 하세요. OO씨, 본부장님이 생각이 많으실 거예요.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OO야, 너 마음 강하게 먹어야 한다. 여기 도둑놈들이 천지야. 회사 얘기는 OO가 아니라 저와 하시죠. 다 너와 엄마를 생각해서... 지금 잘 진행 중이었던 계약 건이 있었는데요, 대표님과 저만 알던 얘기라 우선 식 치르고 자세히 얘기하시죠. 그 법인은 개털이에요, 경비 처리를 다 이쪽에서 했어요. 니가 워낙 어려서, 이 복잡한 걸 어떻게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거의 다 됐는데, 정말 안타까워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서웠다.




나와 아빠의 막내동생인 막내 삼촌은 계속 상주석에 있었다. 삼촌은 삼촌 이름으로 들어온 부의금을 받는 즉시 내게 송금하셨다. 삼촌은 살가운 말을 잘 못 하신다. 내가 짓무른 코를 한번 더 풀 때는 너무 울지 말라고 하셨고, 예의고 뭐고 두 다리를 뻗고 상주석에 기대앉아있을 때는 나를 나무라셨다. 나를 아기 때부터 봐온 어른들은 내심 우리 엄마, 아빠를 두고 나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고 못마땅해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이것이 어른으로서 삼촌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낙엽처럼 쏟아지는 명함들을 모두 모아두고 그것들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몇몇은 꼭 연락하라 손을 잡기도 하고, 누군 의미심장한 눈을 하기도 했지만 이름과 얼굴, 번호를 매칭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엄마가 그래도 밥을 먹어야 한다며 나를 조문객들이 식사하는 자리로 끌었다. 양쪽 끝에 친가 식구들과 외가 식구들이 따로 앉아있었다. 친가 어른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 뻘로 슬픔을 티 내지 않으면서 나를 딱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손님이 아니고, 아빠의 손님도 아닌 할머니의 손님이었다. 나는 그 복잡하고 한스러운 집안에서 할머니의 아들이자 그들의 조카인 아빠가 아빠의 할아버지 다음으로 빨리 세상을 떠났다는 게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외가 식구들이 모인 곳으로 가 밥을 먹었다. 다들 대화를 멈추고 밥을 먹는 나를 가만 지켜보았다. 누구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반찬을 가져다주고, 국을 조금 더 데워오겠다고 말했다. 이 벼락같은 일 가운데 누구도 마음에 없는 괜찮다는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곳의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데, 슬픔을 나누러 온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문득 이 순간 정말 나는 오롯이 혼자구나 실감이 났다. 


나는 이해하지 못할 대화들과 미묘한 눈빛 중에서 어떤 행간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장례는 유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내게 남겨진 이 어지럽고 무책임한 이야기들 가운데 무엇을,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게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 나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 쪽을 바라봤다.


엄마.


내겐 엄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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