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퍼 Feb 20. 2024

애도의 자격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 날, 아빠가 위급하다는 전화가 왔다

학부 마지막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 몸도 마음도 지쳐 선잠에 든 이른 새벽,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처음 듣는 남성의 목소리가 아빠의 휴대폰을 타고 내게 건너왔다. "여기 XX대 응급실인데, A대표가 위급하다고...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비몽사몽 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안방으로 건너가 엄마를 깨웠다. 엄마, 일어나 봐. 아빠가 응급실인데 위급하대. 엄마는 벼락에 맞은 듯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더니 욕설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울먹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가기 전 거실 불을 켜두는데 이 집에 언제, 어떻게 돌아오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두 모녀는 입고 있던 수면 잠옷 바지만 겨우 갈아입고 택시에 타 응급실로 날아갔다. 2020년 12월, 코로나 19가 한창 사람들을 무섭게 통제했었고, 롱패딩을 입고도 온몸이 벌벌 떨리던 새파랗게 추운 밤이었다. 그 밤, 그 밤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는 손 써볼 도리 없이 아빠를 보냈다. 


다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하던데, 우리 아빠는 믿을 수 없이 허무하게 져 버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빠는 수면 마취 상태였다. 고통이 심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재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깨어나도 온전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한 의료진은 현재 병원에는 아빠를 수술할 장치가 부족해 더 큰 대학병원으로 옮겨야만 수술이 가능하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인근 병원들에서 아빠를 받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빠가 피를 그렇게나 많이 흘렸다면 나는 왜 지금에야 여기 있는가. "그럼 저희는 뭘 할 수 있나요?" 머릿속에서는 누군가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데, 정작 밖으로 나온 내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응급실은 거짓말처럼 한산했고 상주 의사는 두 명뿐이었다. 두 명 모두 레지던트였다. 절망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아빠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누워있는 아빠에게 다가가 괜찮다, 다 걱정 말라고 말을 걸었지만 온몸이 기이하게 부은 채로 누워있는 아빠를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엄마가 오열하며 아빠의 피를 닦으려고 하는 것들을 간호사들이 말렸다. "왜 피를 닦으면 안 돼요?" 엄마가 어린애처럼 물었다. 엄마를 추슬러 나가다가 도로 몸을 돌려서 돌아와 누워있는 아빠의 사진을 찍었다. '살아 있는' 아빠를 보는 게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그 불길한 생각이 부정을 타 예감으로 변하고, 끝내는 현실이 될까 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아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술에 취한 듯 보였고, 횡설수설하며 말을 바꿨다. 낙상이라고, 아빠가 계단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본인은 아빠의 지인이지만 아빠와 함께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고, 단지 아빠의 낙상을 목격해서 동행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고, 말을 우물거렸으며, 이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얘기를 들을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어 휴대폰 메모장으로 타임라인을 작성했다. 그가 계속 말을 바꿔 앞뒤가 맞지 않는 메모를 고치며 그를 추궁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사과하고, 애원했던 것 같다. 그는 끝까지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빠와 친한 또 다른 지인이 있다며 그를 부르겠다고 하다가, 아빠의 사무실로 가 혹시 직원들이 퇴근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겠다며 떠났고, 그 후 돌아오지도, 우리에게 연락하지도 않았다. 




아빠의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나는 그것을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작은 아빠께 전화를 걸었다. 울먹였던 것 같다. 작은 아빠는 동행자를 의심하셨다. 나는 그것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한 편, 또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사고를 미궁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저렇게 누워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떤 억울한 사고의 일방적인 피해자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 우리 아빠였다. 우리 아빠. 185cm에, 덩치가 크고, 늘 사람들한테 '든든하다'는 소리를 듣던 우리 아빠. 늘 '든든해야'했던 불쌍한 사람. 아빠가 불쌍한 일을 당해 지금 불쌍하게 누워있어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불같이 화가 치솟는 일이 아니라, 태어나 알고 믿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상상할 수 없었다. 웃겨. 내가 언제부터 아빠를 그렇게 애틋하고 극진히 생각했다고. 이제 와 아빠가 아프다고 하니까. 위험하다고 하니까. 모두 위선이다.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끔찍했다.


같은 H대학 소속의 서울 H대 병원으로 아빠의 이송이 확정된 후, 엠뷸런스를 기다리며 엄마와 대기실에 앉아 대화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그럼. 잘 될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잘 될 거야. 그럴 것 같아. 잘못될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하나도 안 들어."

"엄마도. 잘못될 것 같지가 않아. 느낌이."


우리 둘의 대화는 보통 쌀쌀맞았지만 이 대화만큼은 다정하고 결연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 보고,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지금 둘 중 하나라도 휘청이거나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것을 둘 다 알았다. 그때는 정말, 정말 잘못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 될 것 같았다. 엄마도 정말 그렇다고 했다. 그건 거짓말도, 위안도 아니었다. 엄마는 또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빌어. 잘못했다고 빌어."

"뭘 빌어?"

"네가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벌 받은 거야. 잘못했다고 빌어."

"나 때문이야?"

"아니, 아니지! 그래도 빌어.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맞다. 그랬다. 나는 아빠가 싫었고 미웠고 불편했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감히 그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그게 겨우 이틀 전이다. 아빠가 한창 엄마의 속을 까맣게 태우던 요즘, 나는 아빠가 없으면 엄마와 내가 더 행복해질 거고, 아빠 때문에 우리 가족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랬었구나. 정말 나 때문인가? 그럴지도 몰라. 내 미움이 언령이 되어 이 거대한 불행을 초래했다는 죄책감에 목이 막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태풍이다. 재난이다. 태풍이 왔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태풍이 얼마나 큰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연히 그 앞에 서 있었다. 태풍이 나를 뒤집어 놓을 것을, 그리고 이 태풍은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머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달 후 12월 20일이 되면 아빠가 떠난 날로부터 딱 3년이 된다. 옛날 사람들은 3년상을 치르며 심한 금욕 생활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과 달리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셨지만 몇 번 정도는 죽음을 목전에 뒀던 것 같다. 아빠에게 그동안의 소식을 전달해야 한다면? 


엄마, 아빠에게 학사모를 씌워주진 못했지만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또, 원하던 직무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회사에 취업도 됐다. 아빠가 있었다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자랑했겠지. 내가 짜증을 내고 눈을 흘겨도 바보처럼 웃었을 거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별로다. 


아빠가 법인 대표로서 서명한 연대보증들이 상속인, 즉 엄마와 내게 줄소송으로 돌아왔다. 당장 살던 집도 나가야 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서초동 일대를 돌며 변호사들을 만나던 그날들의 추위를 엄마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겨울은 끝나지 않았고, 소송은 여즉 진행 중이다. 

또, 친가로부터 절연당했다. 이제 엄마와 나는 아빠의 뿌리가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더 있다. 그 좋다는 회사를 그만두고 현재 6개월째 백수 생활 중이다. 내 인생을 찾고, 궤도를 돌려놓겠다며 떵떵거리고 나왔지만 소송이 길어지고, 모녀 관계가 악화되며 그 시간은 온전한 휴식이 될 수 없었다. 

아빠가 제일 아파할 것. 나는 올 초 자랑스러운 종결 선언을 받아 이제 약물 치료를 받지 않지만, 엄마는 아직도 약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하다. 엄마는 3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영원히 저 동그란 것들에 의존해 살아갈까 두렵다.




나는 병원을 옮기고, 장례를 치르고, 발인을 하는 내내 순간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침착을 유지했다. 사촌오빠는 내가 너무 괜찮은 듯 행동해서 걱정이 된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상주로서 장례 중에는 그래야만 했다. 아빠 생각을 하며 슬퍼하고, 아빠의 죽음에 몰입해 애도할 겨를이 없었다. 이 태풍에 약한 우리 엄마가 휩쓸려가면 내 인생도 그대로 무너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태풍은 내 예상보다 오래 내 인생에 머물렀다. 발인 바로 다음날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소장이 도착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관공서, 회사 정리, 법인 직원 횡령, 변호사, 형사, 민사, 세무, 법원, 폐업, 배신, 계약 파기....... 세상이 나보고 죽으라는 것 같았다. 떠난 아빠도 모든 것을 내게 던져 놓은 엄마도 너무 미웠다. 그러나, 그 시간도 결국 지나간다. 산더미 같던 미지의 공포에 하나씩 매듭을 묶고 그것들을 떠나보내면서, 이제 남은 것은 정말 '아빠'라는 판도라의 상자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의 아빠.


아빠를 애도하지 못했다. 보낸 적이 없는 것처럼 살았으니 당연한 말인 것 같다. 꺼내볼 엄두도 나지 않는 아빠라는 사람을 마음 깊은 곳에 덮어 두고, 바쁜 일상을 핑계로 나를 속이며 의연한 척을 했으나 이제는 정말로 들어다 볼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영원히 도망치고 싶지 않다. 적어도 그것이 아빠라면. 남들이 모르는, 오직 세상에서 나만 부를 수 있는 아빠.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늘 그게 뭐든 가게 매대에 있는 전부를 사 오던 유난스러운 아빠,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지만 똑똑하고 늘 내게 해줄 말이 많았던 아빠, 남들보다 항상 좋은 것들을 먹이고 입히고 사주던 아빠, 어릴 때 집으로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그 떨리고 기대되던 마음, 뛰어가 안기면 항상 바람 냄새가 나던 아빠, 다 큰 딸에게 바라는 것 없이 걷기만 해도 감동을 받던, 나를 아기로 여기는 세상 유일한 사람, 아빠를 기다리다 팔에 머리를 베고 잠들 때 어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또 아빠는, 다수의 외도로 엄마를 상처 입혔고, 유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늘 자신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에 시달렸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과 어울릴 때가 많았고, 집보다는 집 밖에 마음을 두고 나돌았다. 아빠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한 채로, 여전히 아빠를 미워하면서 아빠를 보냈다.


아빠에 대한 마음에는 양가적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이 필요하다. 이제 그 어렵고 무거운 것을 하나씩 열어보고 매듭을 짓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태풍에서 나와 내 눈으로 하늘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자격을 갖추고 아빠를 애도할 수 있을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