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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섬 Oct 29. 2022

이름에게

강연의 폭이 다양하지 못한 세종에서는 유명 작가의 강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광클릭을 하지 않으면 본 강연은커녕 대기조차 힘들다. 올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어느 유명 작가의 글쓰기 강연 공고를 보게 되었다. 보자마자 신청한 덕에 운 좋게도 선착순 모집 60명 안에 들어 5주간 무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집에서 강연장까지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버스를 타려면 한참 걸어 나가야 했다. 뚜벅이인 나에게는 번거로운 거리였지만 글쓰기 강연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비하면 그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TV와 라디오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명 작가의 강연을 직접 듣는다는 건 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설렘이 앞서 강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수업 교재로 지정된 작가의 출간 도서와 필기도구를 책상 위에 바지런히 놓아두고 같이 청강할 사람들이 어서 들어오기를 고대했다. 


낯선 얼굴들이 하나둘 자리를 메우니 어느새 강의실은 60명의 이름으로 꽉 차 있었다. 이름들의 연령대는 다양했고,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남성들이 꽤 눈에 띄어 인상적이었다. 맨 앞자리에는 허옇게 흰머리가 드러난 노부부도 자리하고 있어 작가의 명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남녀노소 나이를 불문하고 코로나가 무색할 만큼 밀도 높게 자리를 꽉 메운 이름들을 보며 다시 한번 작가의 인기를 실감하던 그 순간이 내심 흐뭇했고 부럽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그 강연은 매우 값진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수업이 끝나면 사인을 받기 위해 얼굴 모르는 이름들로 매우 혼잡할 거로 생각했는데 5주간이라는 넉넉한 시간 때문인지 그 예상은 빗나갔다. 의외로 사인받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사인받는 사람이 넘쳐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줄을 설 텐데 오히려 사람이 없으니 바쁜 작가님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어느 타이밍에 사인받을까 틈만 노리다 결국 강의 4주 차까지 접어들고 말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책을 구매했으니 꼭 사인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4주 차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른 책을 들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갔다.


반갑게 맞아주시던 작가님이 이름을 물었다.

"예섬이요. 섬은 섬기다 할 때 섬이에요." 

내 이름을 듣고 펜을 움직이던 작가님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섬기다?"

"아닌데요!"

나도 모르게 정색하듯 투박하게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아... 그럼 무슨 뜻이에요?"

당황하신 작가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 

"나아갈 예, 넉넉할 섬이에요."

"아. 이름이 참 독특하네요."

곧이어 뭐라고 대꾸하려 하니 뒤에서 어떤 이름이 갑자기 작가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열댓 명의 이름들이 내 뒤에 줄지어 서 있었다. 갑자기 바빠진 작가님을 보며 아쉬움을 거머쥐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하나의 목적으로 몰려든 수십 명의 저 이름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언제나 이름을 밝히면 한 번에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었다. 종교가 있는 이들은 예수를 섬기느냐며 반갑게 물어왔고 그게 아니면 '섬'자를 '성'이나 '선'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못 알아듣겠는지 재차 이름을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면 항상 - '섬기다'할 때 '섬'이요 -라고 강조한다. 내가 말하기 전에 '아일랜드섬'이냐고 먼저 물어올 때도 있다. '섬기다'든 '아일랜드'든 결국 예를 드는 것이지만 희한하게 아일랜드 '섬'은 싫었다. 아마도 '섬'이라 하면 바다 한가운데 뚝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내 이름은 늘 설명과 함께......

'예섬이요. 여기서 섬은 섬기다고 할 때 섬이에요'가 되어 버렸다.  

나처럼 이 세상 모든 이름은 저마다 어떤 사연들을 품고 있겠지. 




어머니 몸을 벗어나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을 때 가장 먼저 받는 선물, 이름.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나를 상징하고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생에 홀로 남아 나를 대신하는 것은 도장처럼 새겨진 글자, 이름 하나뿐인데. 


어머니는 자궁 안에서 나라는 쌀 한 톨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차 눈물짓고. 어떻게 하면 그 싹을 다치지 않게 잘 키워서 자궁 밖으로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지 고심하고. 온전한 이름을 붙여주고 품에 꼭 안아볼 수 있기를 하루하루 기도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평생 달고 다니는 이름이라 함부로 짓지 못하고 내 아이만은 수많은 이름보다 더 특별하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의 이름을 놓고 얼마나 고심했을지. 그 이름이 내 아이에게 마법을 부려주기를. 누구보다 건강하고, 누구보다 바르고, 누구보다 사랑받고, 누구보다 성공하고, 누구보다 밝게 자라기를. 이름에 염원을 담아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담아 우리의 이름은 지어졌다. 그 염원대로 우리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름 대신 '경리'라고 부르는 사장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하다가 사장이 다시 'OO야'라고 이름을 불러주니 '예'라고 대답했다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가 있다. '경리'라고 불리라고 공들여 지어준 이름은 아닐 텐데. 


어떤 이름은 건강을 잃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다 끝내 병석에 누워서 구름 한 점 없는 햇볕이 짱짱한 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는 아침마다 천변을 걷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상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에 못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름은 외로워졌다. 아내의 투덜거림이 예사롭지 않아도 그냥 무시하고 사춘기 딸이 반항해도 그러려니 넘겼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딸이 늘 있었기에 특별히 관심 두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을 돌보는 시간에 책 한 권 더 보고 일하면서 틈틈이 운동하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늘 곁에 있던 가족도 언젠가는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그는 결국 쓸쓸한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떤 이름은 갇혀버렸다. 그 정도의 일은 크나큰 잘못이 아니라며 남에게 해를 입혔다. 그에게 혼돈의 시간은 찾아왔고 그가 정신을 차릴 때쯤 가족은 멀리 떠나고 없었다. 한순간에 직장도 잃고 사람도 잃은 신세가 되었다. 순간의 잘못으로 그는 어둡고 캄캄한 작은 방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과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어떤 이름은 우울했다. 사람을 만나도 재미가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사람은 자신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다. 표현에 익숙하지 못해서 모든 것을 담아두고 고독을 한 움큼 짊어진 사람처럼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세상은 온통 잿빛인데 말이 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걸핏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결국 오랜 잠을 자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세상에 나올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렘을 가득 안고 그 누구보다 많이 축복받으며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좀 더 잘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이름보다 누구누구 남편, 아내. 누구누구 아빠, 엄마. 누구누구 아들, 딸. 누구누구 사위, 며느리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 

더 이상 불리지 못한 이름은 조용히 잊혀 간다.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주니 왠지 어색하고 이름이 촌스럽다는 말이 슬프게 들린다. 이름은 많이 불러줄수록 그 의미가 살아나고 운이 좋아진다고 한다. 

오늘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건 어떨까. 

모질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름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이름에게 - 아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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