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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Oct 30. 2022

전생에 외국인이었던 게 아니었을는지

결국 마음이 따르는 곳에 길이 있다 




스물아홉 나의 대답은 왜 미국이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막연히 품었던 '해외'에 대한 호기심이 태초의 불씨였다. 처음엔 작고 미지근했던 불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고 뜨거워졌다. 그렇게 작은 불씨는 8년 후 나를 뉴욕으로 이끌어주었다. 뉴욕에서 6개월 동안 인턴십을 한 이후 한국에서 약 2년 간의 회사생활 끝에 스물아홉, 다시 나를 미국으로 이끌어준 것도 꺼지지 않고 있던 그 불씨였다.

세상과 현실의 그림자에 가려져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당신의 불씨는 무엇인가? 어쩌면 오래전부터 당신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작은 불씨가 내는 빛의 신호가 무엇인지,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들여다보길 바란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결국엔 그것이 당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따르는 곳으로 인도해줄 단서가 될 테니까. 

결국 우리의 마음이 간절히 닿는 곳, 그 끝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조기유학 붐? 친구 따라 강남, 아니 해외로 가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해외', '외국'. 단어만으로도 상상 속 흥미 있는 일들이 잔뜩 펼쳐질 것만 같은,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두 글자. 이 두 글자에 대한 나의 막연한 호기심과 관심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 기억으로 중학교 때 전교에서 대여섯 정도의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가거나 가족 이민을 갔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당시 가히 유학 붐이라고 느낄 만큼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미국, 호주 등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즈음이었을 듯싶다. 우리 반에서만 무려 두세 명의 학생들이 해외로 유학길에 올랐으니 말이다. 곧 죽어도 친구가 인생 가장 소중하던 시절이었다. 반에서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한둘씩 떠나자 덩달아 나도 유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는 넓은 땅 외국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다니. 멋져 보였다. 왠지 나의 이상향과 꿈이 더욱 빛나게 실현될 것만 같은 느낌에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앞뒤 생각 않고 곧장 엄마에게 나도 유학을 보내달라고 철없이 졸랐다. 하지만 하나뿐인 딸을 연고도 없는 해외로 혼자 보내기에 걱정이 앞섰던 부모님은 한국에서 먼저 대학 진학을 하기를 권하셨다. 그렇게 아쉽지만 나의 조기유학과 '해외'라는 꿈은 잠시 일단락되었다.



8년 뒤, 해외인턴십을 통해 비로소 꿈에 한 발짝 다가서다

이후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한국의 대학입시라는 긴 터널을 지나 꿈에 그리던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 되었다. '해외', '외국생활'에 대한 나의 동경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건 늘 마음속의 꺼지지 않는 작지만 강렬한 불씨였다. 전생에 외국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나의 무의식에는 항상 '언젠간 꼭 해외에 나가서 살아봐야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양장점을 운영하셨던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옷이 좋았던 나는 의류학과를 전공으로 택했다. 대학교 입학 직후 신입생 환영을 위한 학과장 교수님과의 모임 자리였다. 학과장 교수님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열정으로 따끈따끈한 신입생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우리 과에는 대학교 4학년 때 파리, 뉴욕의 패션회사에서 인턴십 경험을 하며 동시에 학점이수도 받을 수 있는 소수정예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어요. 단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 열심히 해서 4학년 때 꼭 도전해보길 바라요."


학과장 교수님의 말을 듣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해외인턴십을 통해 실무경력을 쌓으며 동시에 그토록 바라 왔던 해외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 8년 전 잠시 보류되었던 나의 소망 실현을 위해 철저히 준비된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어리바리한 대학교 신입생에게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열심히 해서 대학교 4학년 때 꼭 해외인턴십을 가고야 말겠다.'


1, 2학기에 걸쳐 프로젝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해외인턴십 프로그램 수업은 6명 내외 소수정예로 운영되었기에 학점과 지원서 심사를 거친 뒤 교수님과의 최종 인터뷰를 통해 합격자가 결정되었다. 당시 우리 과 학생이 50여 명이었으니 대략 상위 10%에 속해야 하는 경쟁률이었다. 해외인턴십이라는 설레는 꿈을 위해 4년 동안 악착같이 학점과 스펙을 관리하며 목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4학년 1학기, 마침내 나는 6명 중 1명이 되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외인턴십 프로그램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인턴십을 하게 될 도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파리와 뉴욕,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 유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였을까. 왠지 나는 뉴욕에 본능적으로 더 마음이 갔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해외생활을 뉴욕에서 시작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인턴십을 하게 될 회사에 지원하기 위해 에이전시를 통해 관심 있는 회사 몇 군데에 이력서를 보낸 뒤 결과를 기다렸다. 2주가량이 지났을 즈음, 나는 최종적으로 브랜드 톰 브라운(Thom Browne)의 Production 포지션으로 인턴십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뉴욕이라니! 머릿속에서 이미 나는 뉴욕 한복판, 맨해튼 거리를 활보하는 뉴요커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4학년 2학기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 9월, 나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8년 전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그리며 상상했던 첫 해외생활이 비로소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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