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서 끊어지기 일보직전인 값비싼 명주실, 버려도 되지 않을까?
사실 얼마전 오랫만에 동창모임에 다녀온 후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정리했다. 예전처럼 친구들의 대화에 끼질 못했다. 대부분 결혼을 한 친구들은 전세대출, 자녀교육, 남편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더 이상 어린시절 친구들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각자 삶의 방향과 가치관이 확고해졌으며 그 것에 관한 신념과 고집도 생겨났다. 나는 확실히 느린 편 같았다.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으며 부모님과 함께 사는 처지이기에 '내 집 마련'에 대한 이야기에도 끼질 못했다. 어느 순간 부터 우리는 모임을 가지면 각자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공감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소리도 들렸다. 수진이와 영미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늬앙스로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수진이는 내게 말했다. "아니 영미는 남편이랑 그렇게 돈에 미쳐서 24시간이 부족할세라 죽어라 일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고. 애들 피아노나 운동같은 예체능이라도 시켜야지. 그렇게 돈 벌어서 아끼면 뭐해?"
영미는 내게 말했다. "아니 수진이는 애가 아직 5살 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수학, 영어, 국어까지 시킨다고?애 잡겠더라. 걔는 나한테 이것저것 훈수두는데 듣기 싫어 죽겠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각자의 생각이 확고해진 어른이 된 것이었다. 이 두명의 친구가 나에게 서로에 대한 뒷담화를 털어놓을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수진이와 영미가 단 둘이 만날때는 내 뒷담화를 하겠지. 쟤는 저래서 시집도 못가고, 내집마련도 못하고, 나이값도 못하고 살겠지 하면서 말이야'
어느 순간 부터 이들 모임에 나가는게 귀찮고 싫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동창모임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남친도 직장도 잃었는데 귀찮아진 친구들 잃는 것 쯤이야.
내가 일방적으로 먼저 연락을 끊었지만 좀 이기적이었나 싶기도 했다. 그들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껏 딱히 연락이 없는 것보니 우리 관계의 끝은 모두들 예상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렇게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연인도...직장도...친구도...한 번에 떠나보냈다.
그렇게 친구들과 관계를 정리를 한 후 돌아오는 길의 집 근처 카페에 들렀다. 체리색상의 튼튼해보이는 테이블이 여러개 놓여진 카페였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뭔지모를 공허함이 느껴지는 파비오 칼베티의 그림이 걸려있는 카페였다. 홀로 창 밖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 상점들의 간판 조명들이 빛나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포근하게 느껴졌다. 학원에서 힘든 공부를 마쳤는지 웃는 얼굴로 귀가하는 학생들. 회사일을 끝내고 카페에서 따듯한 차 한잔을 테이크아웃해가는 사람들. 오히려 아침에 바라보는 길거리의 사람들 보다 긴장이 풀어진 느낌이어서 평온하게 느껴졌다. 밤 늦은 시간의 카페는 조용했다. 어두운 불빛아래 나는 커피 잔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각설탕 하나를 '퐁당'하고 빠뜨렸다. 그리고 티스푼으로 휘저으며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하나, 둘 씩 지워나갔다. 밤 늦은 시간의 커피는 왜 이리도 달콤한지.
직장도 친구도, 연인도 잃어버린 나란 여자는 밤 늦은 시간 카페에서, 커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졌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실타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겨우 풀었을 때 다 낡고 꼬부라져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누군가는 그 실타래는 소중한 것이니 끝까지 관리를 잘해서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결국, 이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려 깨끗하게 없애버리기로 했다. 후련하게.
그것은 잘한 결정같았다.
낡고 끊어지기 일보직전인 실을 품고 있느니 버리는게 낫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게 사연이 깃든 값비싼 명주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