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디카페인 아이스 커피 한 잔
"여보세요...고모?"
"보니...전화 맞지? 잘 지내지?"
너무 오랫만의 연락이라 사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결혼 적령기라고 볼 수 있는 20대 후반때부터 친척들과의 만남을 피해왔으니 거의 10년 만이다. 나는 고모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고모라서 그런지, 그 시대에 맞지않게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나에게 잔소리나 훈수를 두려고 하지 않았다. 본인 삶 또한 동시대 사람들과는 워낙 다른 삶이다 보니 차마 조카에게도 훈수를 두지 못했겠으리라. 왜냐하면 나도 머리가 꽤 커버린 조카들에게 백수에 독신인 내가 뭐라 말 하고 싶어도 조심스러울때가 많기 때문이다.
"보나야 보고 싶다. 별 일 없지?"
"고모 건강하시죠?"
"보나야 네 카톡사진 보니까 이제 길가다가 보면 몰라보겠더라. 예뻐졌어. 보고싶다"
고모의 '보고싶다'는 말이 그 어느때 보다도 진심으로 느껴졌다. 너무 오랫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랬다.
"보나야. 아빠한테 이야기 들었지? 고모는 이제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신세야. 그동안 내 집 좀 잘 돌봐줘. 직장 그만 뒀다며...다 들었어. 그냥 머리 식힐 겸 잠시 내려와 지내고 있어. 사실 웅이 때문에 그래. 돈은 안 받을께. 웅이 사료랑 병원비, 네 수고비도 넉넉히 준비해 놨고. 걱정말고 그냥 집청소만 해주면 돼. 뭐 잠시가 아니고...더 길어질 수 있지만. 여기 좋아"
웅이는 고모가 10여년 부터 키우던 반려견이다. 갓 태어난 꼬물이 아가때 모습만 기억날 뿐이다.
어쨌든 나는 처음듣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모와의 전화통화를 끝내고 난 후 아빠에게 달려갔다.
"고모가...요양병원에 들어가??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거야? 그리고 내가 고모집에 가 있어도 되는거야??"
-"그...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고모한테 연락이 왔어. 자기 집에 잠시 내려와 지내라고"
아빠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직업도 가족도 없는 니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 시골에서 혼자 지내? 됐어! 그 집은 싸게 매물로 내놓던지, 월세로 내놓던지 할꺼야. 아니 걔는 무슨 쓸떼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그렇게 아빠는 '욱'하듯이 소리를 지르고는 나갈 듯 싶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고서는 나에게 또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너는 네 책상서랍속에 있는 맥주캔들 좀 정리해. 습관이 무서운거야. 그러다가 알콜중독 돼!! 당장 정리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벙찌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내 책상 속을 뒤져보았나?
왠지 기분이 나빴다. 나이 40을 바라보는 딸의 방을 뒤져봤을 아빠의 속사정이 궁금하기도 하고 왜 내 방을 뒤지고 그러나 싶기도 했다. 혹시 내가 책상속에 몰래 넣어둔 비밀일기도 읽어본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가 궁금했는지 내 일기장을 몰래 읽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열쇠로 잠그는 일기장을 구매해 쓰기도 했다. 요즘은 귀찮아서 그냥 작은 노트에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설마 그 일기를 읽은 것은 아닌지?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기분이 나빴다.
그러다가 그 불쾌한 감정이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왔다.
사실 맥주 한 캔을 마셔도 부모님 눈치가 보였다. 직장과 연인을 잃고나서 백수신세가 된 나에게 취침 전 맥주 한 캔은 유일한 나의 구세구와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과 한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한소리 하실께 뻔했다. 그래서 나는 몰래 마셨다. 잔소리를 피하고자 몰래 맥주를 마시고, 빈 캔은 서랍속에 넣어두었다가 주말에 아파트 분리수거날에 모아서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범죄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아빠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 한숨을 '푹'쉬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서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껴서 말이다. 이 나이에 독립할 능력이 되질 않아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맥주 한 캔도 눈치보며 마시고, 누가 볼세라 일기도 편하게 쓰지 못하는 신세말이다.
그러다가 다시 고모와의 대화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이 참에 고모집에 내려가서 지내볼까? 오랫만에 직접 전화해서 자기 집 좀 봐달라고 한거 잖아. 나는 진심으로 느껴졌는데?"
............................
"아니야...아빠 그렇게 화내는거 정말 오랫만에 봐. 아빠도 정년퇴직하고 여러모로 심란하신데 딸은 백수고, 자기 여동생은 요양병원에 가야한다니 예민하시겠지. 그냥 가만히 있자. 가만히"
오랫만의 고모의 전화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는 하얀 레이스커튼이 나부끼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 캔만 마셨으면..........'
맥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여기서 맥주 한 잔을 더 마시면 영영 맥주를 못 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창 밖으로 보이는 가로수 불빛과 달빛이 아스라이 비춰오는 낭만적인 그런 밤이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까웠다.
나는 맥주대신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로 했다.
내 자켓 주머니에 꾸깃꾸깃 구겨 넣은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인스턴트 한 봉지가 생각났다.
희성이가 예전에 주머니에 맛있다면서 그것을 넣어준 것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었다.
"먹지 않고그냥 버리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간절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게다가 밤에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디카페인'이라니 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인스턴트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스틱을 소량의 뜨거운 물에 녹여낸 다음 찬물로 한 컵 가득 채웠다. 그리고 얼음 6알을 넣어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투명한 얼음잔에 찰랑이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의 비쥬얼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잠 못잘 걱정도 덜어주는 낭만가득한 완벽한 '오늘의 커피'였다.
"오늘은 희성이한테 고마워지네"
나는 달빛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밤바람 그리고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즐기며 오늘 하루의 소소한 소란을 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