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헤어지고 난 후 후련한 마음과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그 아린 감정이 사랑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회적 시선을 신경쓰는 그런 여자였다. 이 나이에 남자도 없는 완벽한 독신이 되었다. 사실, 연애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체력도 감정도 받쳐주질 않았다. '세상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실패자겠지?'그런 패배감에 마음이 아린 것이었다.
나 하나 먹고 살겠다고 다니는 회사도 겨우 다니고 있던 상태였다. 1년 동안은 죽어라고 버텼다. 30살 중반에 이직한 회사였기에 이제는 정말 마지막 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동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나만의 거래처를 확보하고 이제 일이 익숙해지는 듯 했다. 이제 쉬는 주말에는 겨우 일 생각은 접고 쉴 수 있을 만큼 적응했을때, 실적압박은 더욱 심해져갔다. 1년은 지났으니 조직에서 원하는 목표대로 실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초반에는 패기있게 '나는 할 수 있어!'를 외치며 사비를 털어 홍보 프로모션에 각종 사은품까지 얹어주면서 무리하게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점점 밑빠진 독에 물붓기 처럼 느껴질 때 쯤 나는 내 눈에서 빛을 잃어갔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다시 주말에는 평일날 펼쳐질 일 걱정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할 정도였다.
회사일에 적응하는 과정이 순탄치가 않자, 회사에서의 입지는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작아져가는 듯 했다.
이렇듯 조직에서 약자가 되어가면 그걸 기가막히게 눈치채고 경쟁자 하나라도 견제, 제거하려는 하이에나같은 동료도 있기 마련이다. 마음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옆 동료는 내 선임도 아닌주제에, 겨우 몇 달 먼저 입사했다는 이유로 매사 가르치려는 말투로 사람 속을 꼬아 놓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과 사족을 붙여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보나씨는 입사한지 1년 넘지 않아? 그걸 아직도 몰라? 그 일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야!! 보나 씨는 일을 참 특이하게 하네? (한숨) 푹~'
문자 상으로 보면 별다른 큰 문제가 없다. 나는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다. 자기 손에 피 한방을 안 묻히고도 자신의 경쟁자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일상의 기분을 망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사람의 깐족거림을 무시하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네네' 하고 말았다. 그럴수록 이 하이에나는 비꼬기, 깐족거림의 수준이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참았다. 이런 조무라기 때문에 내가 퇴사를 할 순 없으니까.
나는 먹고 살아야 했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영업을 하면 할 수록 적자였다. 게다가 입김이 쎈 깐족거리는 직원을 무시하기 시작했더니, 회사생활이 더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정치력이 부족한건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회사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팀장님과 사이가 좋았다. 그 팀장님은 끝까지 나에게 화이팅을 외쳐주었고, 천천히 가라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었다. '지금 적자여도 꾸준히만 하면 언젠가는 그게 뒤집힐 날이 오긴 와'. 결국에는 이 팀장님때문에라도 퇴사는 하지말고 잘 버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좋은 팀장님을 만나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적자였던 내 실적도 어느 순간 크게 증가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1년을 더 버틸 수가 있었다. 팀장님과의 합이 좋았고 실적도 괜찮았다. 이대로라면 이 회사에서 10년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부서변경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니...지금 잘 하고 있는데 왜'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이 조직에서 안정이 되어가나 싶었는데 회사에서는 나와 팀장님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나와 팀장님이 열심히 해서 일군 결과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우리 둘이서 좋은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안정된 회사로의 안정된 고객유입'덕이었다. 누가 와서 일해도 이정도 실적은 낼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함께 일했던 팀장님 밑으로는 회장님 지인 자녀라고 소문난 신입사원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지치기 시작했다. 새로 만난 팀장님과 다시 맞춰서 일을 하려고 하니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게다가 부서를 옮기면서 '비꼬기 대장' 동료와 바로 옆에 나란히 책상을 두고 사용하게 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난 이 동료의 화법이 싫었다. 걱정하는 척 하면서 사람 속을 튀틀리게 만들었다.
"자기. 전 직장 상장도 안 된 작은 회사였다면서? 월급밀렸다매? 그런데 그걸 경력으로 쳐줬어?우리 회사가 좋긴 좋아. 내가 자기 밀린 월급 받아줄까?"
나는 그 말을 듣자 또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저런 말을 왜 하는거야?
문자 상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다. 나를 위해 밀린월급을 받아주겠다고 걱정해준 것일 뿐. 그런데 항상 이 사람과 대화를 하고 나면 은은하게 오랫동안 기분이 나빴다. 차라리 나에게 대놓고 나쁘게 말을하고 화를 낸다면, 나도 같이 반격해서 싸우기라도 하겠지만. 조근조근 깐족거리는 이 사람 말에 내가 '발끈'하는 순간...항상 내가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함께 일을 했던 팀장님과 떨어지고 난 후부터 또 막막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동안의 경험과 경력이 쌓여있었기에 다시 이 위기를 극복해보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또 다시 일어나보기로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일과 상사에 또 적응을 하느라 예전만큼 실적은 나오지 못했다. 새로운 팀장은 이런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를 더 갈구기 시작했다. 재촉하고 닥달했다. '이런거는 빨리 배워야 해요. 왜 이렇게 꾸물거려요 바로바로 처리하세요! 이렇게 처리하면 안 되지? 이런거 누구한테 배웠어요? 그만 좀 물어봐요! 아직도 몰라요?' 새로운 팀장의 땅 꺼질 듯한 한숨소리는 나의 마지막 일상의 평범한 일상마저 무너뜨리기 일수였다. 이렇게 새로운 팀장에게 혼날때마다 옆자리의 비꼬기 대장은 꼭 한 마디씩 더 거들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보나 씨. 그거 아직도 몰라? 지금 그래도 2년차 아니야? 배워야 해. 그렇게 하면 안 되는거야."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여러사람들 앞에서 꼽주는 둘의 환상적의 콜라보에 나의 입지는 점점 작아져갔고, 작아진 나의 입지에 대놓고 무시하는 후배까지 생겨났다. 어느새 나의 책상은 저 구석 기둥옆으로 밀려났다. 처음에는 '비꼬기 대마왕'과 멀어진 것에 대해 기뻐했지만....곧 나의 책상은 사라져버렸다.
이제 나의 업무는 영업보다는 회사 방문 고객 응대이니 책상은 필요 없단다.
하반기 회사의 실적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실적압박은 심해지다 못해, 결국 재고 떠넘기기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렇게 적자 위기가 도래되자 하나 둘 씩 누군가의 책상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버텨보려고 애썼다. 살아야 하니까.
주말마다 쉬는게 아니었다. 알수없는 고통의 감정에 휩싸였다. 내 책상 하나 없는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한다니. 나를 무시하는 새로운 부서 사람들과 새파란 어린 후배들. 벽보고 일을 하느니 차라리 차에 치여 죽고 싶단 생각...................................을 왜 해?
나는 퇴사하기로 했다.
나는 마음의 정리를 하고 사직서를 냈다. 새로운 팀장은 애써 아쉬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요즘 마감시즌인거 몰라? 마감시즌까지만 일하고 가. 이거 다른 동료들한테 폐끼치는 거야"
-"제 책상이 없어서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박스 정리하고 까는건데. 책상이 뭐가 필요해? 그리고 방문고객들 요즘 여간 많아? 그 고객들 건 마무리하고 가!'
"그건 원래 제 옆자리 앉은 분 담당이었잖아요. 어물쩡 저한테로 다 넘어와서 그렇지"
-"아니 이제 나간다고 못하는 말이 없네 없어. 회사나가면 지옥이야. 요즘애들은 끈기가 없어. 1년 띡. 2년 띡 하고 말고. 도대체 왜 퇴사를 하는거야?"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1년동안 적자를 봐가면서도 버틴 신입의 열정이 있었다. 그 이후 만남 팀장님과의 놀라운 팀웍으로 일궈낸 수많은 새로운 거래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부서이동. 하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동료직원의 갈굼. 책상까지 빼버리며 사람의 자존감을 눌러놓은 사건들. 무시하는 눈빛의 후배들. 영업을 하면 할 수록 심화된 떠넘기기로 인한 적자.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놓고는 도대체 왜 퇴사를 하냐고 이제서야 묻는 건지.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 철없어서 일 그만두고 여행하고 힐링하려고 퇴사해요! 혼자서 잘 먹고, 놀려고 퇴사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