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종이 인간의 고군분투기 10
외부의 물리적인 자극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서 익혔으니 이제는 감정적인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절하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쌓여와서 우울증을 초래한 중점적인 요인(선천적, 기질적 요인은 배제한다)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린 데에 있다. 오랜 기간의 상담과 나를 알기 위한 이 글을 써 내려가며 내린 결론이다. 감정이입을 잘하고 눈치가 빠르며 상대의 비언어적인 표현을 과도하게 알아채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는 내 성향은 곧 지속적인 불안감을 야기했다. 내가 느낀 것이 맞는 것인가 이 사람은 말은 저렇게 해도 표정으로 나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와 같은 끊임없는 혼란이 매 순간 엄습했다. 타인이 어떠한 불편한 내색을 하거나 슬픈 감정을 표출하면 동시에 나도 그 순간부터 심장이 눌린듯한 답답함 또는 피가 머리를 막는 기분이 들었다. 실례로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본가에 다녀오면 삼일을 내리 앓아눕기도 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부모님이 나를 위로해주지 않아서, 혹은 집안의 갈등을 알고 싶지 않아서 정도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는 상대의 모든 감정을 내 감정처럼 흡수했고 똑같이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감정에 짓눌린 나의 내면은 뇌를 24시간 가동시켰다. 타인의 감정에 함께 사로잡혀 있었고 내가 끌어안지 못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죄책감까지 느꼈다. 현재까지 나의 방식은 모든 감각이 자동적으로 인지한 방대한 데이터를 그대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머릿속에서 수없이 분석하면서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방식이었다.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생존법 중급 이론은 그 데이터들을 나를 소모시키지 않으면서 정리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다.
<이림 생존법 중급: 감정 필터 장착하기>
지난 챕터에서 나를 자극시키는 것들에 대해 적어보았는데, 그중 주변의 불평과 불화는 언제나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서나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감정 필터가 필요한데, 그것의 핵심은 내 감정인가 아닌가를 확실히 구분 짓고 아는 것이다. 어떤 이가 누군가를 싫어해서 풍겨내는 증오의 감정이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짜증 나는 감정은 나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증오와 짜증은 나의 감정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것을 알면 타인의 부정적인 기운이 나를 짓누르지 않게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엄마와 대화하는 것, 슬픈 뉴스나 영화를 보기 어려워하는 것 또한 타인의 무기력하거나 슬픈 감정이 내 감정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과도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공감하되 압도당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위로하고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내가 할 역할의 전부임을 안다. 상대의 감정으로 인해 내가 아파하거나 책임감 또는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떠한 일이 있어 힘들다고 말했다면 힘든 감정은 엄마의 것이고, 엄마가 힘들어하니깐 안타깝다가 나의 감정이다. 해결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다. 난 지금까지 엄마가 힘든 얘길 하면 그 자체로 힘듦에 같이 절여졌기 때문에 철저히 차단해 왔고, 피할 수 없을때에는 반대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시름시름 앓았다.
이렇게 순간순간 '아, 지금 이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지만, 주디스 올로프의 책에 의하면 방패막을 시각화하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방패막을 상상하는 것인데, "부정적인 기운은 방패막에 가로막히지만, 긍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기운은 통과해 들어"오는 방패막을 내면에 만들어 두는 방법이다. 필요한 상황에서 이 방패막을 치는 기술을 활용하라고 올로프는 말한다.
<이림 생존법 중급: 직감 레이더 보수하기>
예민한 사람들은 직감이 매우 발달해 있다고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쏟아져 들어오는 많은 정보에 압도당하기 쉽다. 모든 비언어적 행위와 주변 정보를 모두 한 번에 인지하기 때문인데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빠르게 캐치한다. 이것은 때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데에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확인되지 않은 상대의 감정에 앞서서 스스로 고통받을 경우가 매우 잦다. 나는 어디까지가 직감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그 부작용은 이전에 언급했듯이 연인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것을 구별해 내는 것 또한 책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핵심은 "자신이 감지한 정보가 중립적인지 감정적인지에 주목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때 그것이 나에게 불안감이나 흥분을 유발한다면 나의 내면의 감정이 투영된 것이고, 감정 없이 불현듯 드는 생각은 정확한 직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만 구분할 줄 알아도 상대의 표정, 말투, 행동에서 읽어내는 모든 정보를 과하게 생각하여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방법들을 실천하며 다음 단계로는 나의 행동패턴을 바꾸는 방법과 이미 소진된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에 대해 탐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