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종이 인간의 고군분투기 8
수 달 간 심리 상담을 하는 동안 나는 약 이외에 나를 지탱할 만한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했다. 일련의 조치들로 나를 깊은 바다에서 황급히 건져 올리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것은 항우울제라는 위대한 현대 의학의 도움이 8할을 차지했다. 죽을 것만 같던 고통이 고작 약 몇 알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저 '나는 그러한 신경계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그럼 이제 평생 이 약을 달고 살면 되는 것인가.'라는 쉬운 결론에 당도했다. 소소한 부작용 정도야 이 정도 상태만 유지시켜 줄 수 있다면 조금 무시해도 될 법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내어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으려 했던 처음의 의지가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상담을 계속해야 하나, 이제 나 일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고, 사람 만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느낄 때 즈음, 매 세션마다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던 상담 선생님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말해 주었다.
"타인과 나 사이에 필터를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필터요? 그게 뭐예요?"
"타인의 감정을 모두 내 감정으로 흡수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주변의 자극에 타격을 받지 않고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곧 나는 약한 사람이야라는 인정이었다. 약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들리고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 그런 예민한 종이인간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매우 부정해 온 것이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타인의 감정을 모두 내 감정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나는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감각은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게 예민 종자의 숙명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감추고 대처하는지에 대한 능력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애초에 필터를 장착하면 된다고?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요? 또 의문만 가득 생겼다. 그러다 우연히 주디스 올로프의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라는 책을 접하게 됐는데, 신기하게도 이 책 속에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필터가 무엇인지 적혀있었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도. 다음은 이 책에 기술된 초민감자의 자가진단 문항이다.
지나치게 민감하고 수줍음이 많다거나, 내성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주 압박감을 느끼고 불안해지는가?
말싸움이나 고함을 들으면 불편한가?
무리에 섞이지 못한다는 기분이 자주 드는가?
군중 속에 있으면 녹초가 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기운을 차려야 하는가?
소음이나 불쾌한 냄새,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을 견디기 힘든가?
화학물질에 민감하거나 따끔거리는 옷을 잘 못 입는가?
어디를 가든 일찍 나오고 싶을 경우를 대비해 본인의 차를 가져가는 편인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식을 하는가?
친밀한 관계로 인해 숨이 막히게 될까 두려운가?
깜짝깜짝 잘 놀라는가?
카페인이나 약물에 과민하게 반응하는가?
작은 고통도 참기 힘든가?
사회적 고립을 택하는 편인가?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나 감정, 신체 증상을 흡수하는가?
멀티태스킹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편한가?
자연 속에서 재충전을 즐기는가?
어려운 사람이나 에너지 뱀파이어를 상대한 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대도시보다 소도시나 시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여럿이 모이는 것보다 일대일이나 적은 인원과 교류하는 게 좋은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예민한 독자들은 몇 개의 문항에 해당하는지 궁금하다. 이 자가진단법이 내가 초민감자라는 것을 정의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 이 우울의 실마리를 풀어나갈지에 대한 갈피를 잡아주었다. 이 에세이의 타이틀이 나타내듯이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 많은 지하철에 타면 토할 듯한 울렁증이 밀려오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소리치지 않더라도 사람들끼리 논쟁이 오가면 두통이 왔다. 큰 목소리와 소음이 들리면 귀가 아프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러다가 내가 그만뒀지 일을.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결국 우울증이 와서 말이야. 그런데 이 우울증을 나의 예민함과 연결시켜 보니 지난날의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됐다. 모임에서 지쳐버려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도, 일 외에 모든 것을 버거워했던 것도 체력이 달리거나 내향적인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에너지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민감한 사람이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회복 시간을 나에게 어떻게 주는지 모르고 더 소진시키는 길을 걸어온 것이고. 내가 특정 사람을 그렇게 원했던 것도 나에게 자극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정감을 느껴서였음을 알게 됐다. 이 모든 것이 민감함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타인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흡수하지 않고 민감성을 잘 다룰 줄 알게 되면 되는 것뿐이지 않을까? 나에겐 이 예민함이 주는 불편함과 고난이 항상 더 크게 존재했는데, 그 이면의 장점을 더 크게 만들면 예민한 종이 인간에서 섬세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나는 빠르게 모든 챕터를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