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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n 19. 2024

터닝포인트

예민한 종이 인간의 고군분투기 6


    생각해 보니 나는 누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 누군가만 찾으면 나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로운 밝은 아이가 되었으니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어 놓은 적당한 선을 넘나들지 않는 것이 나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는 방식이라 생각했으니까. 다른 사람의 말들에 누구보다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누구에게나 평온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무던한 사람으로 타인에게 비치는 것이 내가 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이러한 방식에는 '나'라는 존재가 빠져있었다. 나는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외로울 땐 타인을 통해 그 감정을 채웠고, 무던한 사람이라는 가짜 자아로 진짜 나를 나오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언제 있었는가 떠올려 보면 그것은 결코 대학 합격도, 오래된 연인과의 헤어짐도,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도 아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지나온 세월이 송두리째 뒤엎어지는 기분이 드는 이 순간 말이다. 나는 지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빛을 보고 있다. 가장 어두웠던 날을 떠올려보면 이것은 가히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병원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을 그 당시에는 정신적인 증상 이외에도 여러 신체 증상이 있었다. 살이 키도 다 자라지 않은 청소년기 때처럼 빠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인간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식사를 챙기는 게 너무나도 버거웠다. 왜 인간은 뭘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키면 배불러지는 알약이라도 있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요리고 배달이고 치우고 차리고 아무것도 못하겠으니 생식을 하자며 당근 한 묶음 사서 깎았다. 겨우 다 깎아내고 힘들어서 엉엉 울었다. 손은 갈수록 떨렸고 날이 따뜻해졌는데도 매일 추워서 사시나무 떨듯 오들 거리다 잠들곤 했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부정적인 기운이 나를 잠식하듯이 파고들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기분, 내 삶이 다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듯이 몰아쳤다. 어떻게든 뇌를 파내 버리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한 두 단어의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그것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약을 먹은 지 이주쯤 되던 날, 다른 건강상의 이유로 채혈을 하다가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누구에게도 연락을 할 수 없어서 집에만 가자라는 생각으로 괜찮아 괜찮아를 스스로 되뇌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 와중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곳에서 또 쓰러지면 누가 나를 발견해 줄까라는 생각을 했단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시간들을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버둥 쳐온 과거의 나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내가 나를 놓으면 안 되겠구나. 나를 살릴 사람은 나 자신이구나. 모든 것이 여전히 버거웠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온전히 나를 챙기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이 시기를 보내기로 말이다. 내가 일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내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며 조급해하는 대신 진짜 나를 위한 단단함을 다지는 시간으로 온전히 투자하기로. 우울한 기분이 심하게 몰려올 땐 어떻게든 산책을 나갔다. 아침엔 규칙적으로 일어나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귀찮아하던 식사도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약 잘 챙겨 먹기, 자기 전에 꼭 샤워하기, 매일 설거지하기, 요가하기 등등, 어르고 달래듯이 나와 내 삶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 후로 한 달 남짓 흘렀을까, 어느 날 아침, '하암, 잘 잤다'하며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떴다. 잘 잤다라니,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기지개라니, 이게 무슨 일이지?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에 스스로 놀랐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최근 몇 년간 잘 잤다라며 눈을 뜬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잠은 이렇게 자는 것이었던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아마 오늘 하루가 힘들지 않을지도 몰라.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에 글쓰기는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머리를 뜯어낼 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울부짖듯이 써 내려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글을 쓰는 것도, 요가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내가 하루를 버티기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행위 자체로써의 즐거움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행위가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나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 이제 조금 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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