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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라이프 Mar 17. 2023

의미는 내가 결정하자.(대중문화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의미, 대중문화, 결정)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대중문화가 어떻게 대중을 지배하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니즈가 새로운 문화산업을 일구어내고 산업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의 관점이 제시된다. 우리의 욕망 자체가 문화산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산업이 먼저 우리에게 욕망을 제시하고 그 욕망을 문화산업이 다시 충족시켜 주면서 우리는 끊임없는 소비와 만족의 쳇바퀴를 돌며 자본주의의 문화산업에 지배당하게 된다.  

 


1. 대중이 만든 보편적 의미에 종속 돼버린 나


우리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미지를 소비한다. 오마카세, 호캉스, 전시회에 가는 나는 정말 순수한 의도만으로 그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 ‘고급스러운 식문화를 즐길 줄 아는 나’, ‘호텔문화를 누리는 나’, ‘고상하게 예술문화를 이해하는 나’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어 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 나도 무언가 의미를 추구할 줄 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대중문화의 뿌리는 미디어에서 출발했다. 누군가 그런 문화들을 누리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보고 남들을 따라 하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온갖 미디어를 통해 일상에서 세뇌된다. 우리의 일상이 곧 미디어로 점쳐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지배당하는 사람의 문제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의미를 결정하기보다, 대중의 의미를 그저 수용하는 수용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스스로 의미를 결정하는 능력이 부족해지고 남들의 결정한 의미를 따라가냐, 따라가지 못하냐에 따라 내 인생의 의미까지 휘둘리게 된다. 보편적 의미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불행한 사람이 돼버린다.   



2. 왜 남들의 의미로 고통받는가?


최근에 캠핑 문화가 유행이다. 캠핑장에서 불멍을 때리면 그렇게 좋은 힐링이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릴 적 가족끼리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니 지금의 캠핑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고급 텐트도 아니었고, 멋들어진 장작도 없었고, 블루투스 스피커도 없었다. 맛있고 질 좋은 밀키트도 없었다. 모래와 물이 뭍은 형편없는 행색으로 라면만 끓여 먹어도 그땐 너무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캠핑을 하는 내 이미지는 안중에도 없고, 순수한 그 캠핑의 경험만을 내 의미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마 지금 내가 캠핑을 간다면, 캠핑을 즐기는 내 이미지를 의식해 이것저것 남들에게 꿇리지 않는 질 좋은 캠핑을 만들고자 노력할 것 같다. 인스타에 올릴 만한 멋들어진 음식, 신박한 캠핑 도구, 고급스러운 텐트 정도는 있어야 같이 캠핑을 가는 사람들에게 기도 살고 떳떳해지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남들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차이가 생기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일상에서도 고통받는다. “남들은 저렇게 사는데”, “저 사람들은 저런데”라며 끊임없이 무의식의 사고는 남들과의 비교를 멈추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능력, 처지, 인성, 사회성, 대인관계, 경험 등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는 동시에 나 스스로를 비관하고 자책한다.


대중의 의미에서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찾고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나는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지 못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업,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인테리어, 남들이 좋다고 하는 물건 같은 특정 개체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소비성향, 성격, 행동, 심지어 말투와 표정, 몸짓,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까지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인정받은 것이 의미 있다고 규정한다.


우리가 연애할 때를 생각해 보자. 사랑에 빠진 채로 1시간씩 통화하고, 자기 전에 달콤한 목소리로 잘 자라고 얘기하는 등 이런 특정 행동들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진 않는다. 그저 상황에 따라, 참여자들의 성향과 성격과 처지에 따라 보일 수 있는 연애의 한 면모다. 그런데 이런 면모마저 “내 친구들은 다 이렇게 연애한대.”라는 말과 함께 미디어로 퍼지면서 마치 꼭 그렇게 해야 진짜 사랑이 되는 것 같은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그런 일부의 면모마저 정답처럼 여겨지고 퍼지며 모든 사람들이 그 행동을 따라 하게 된다. 또한 그 행동을 따라 하지 못하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진다. 


똑같은 행동, 똑같은 말, 똑같은 대처방식, 똑같은 성향 등 남들과 같아지면서, 남들의 의미를 추앙하고, 마치 내가 스스로 그 의미를 결정했다고 착각하지만 그 깊은 뿌리는 남들의 의미를 답습한 것일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보편적인 의미에서 벗어나면 불편함을 느끼고 개별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개인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데 넌 왜 그러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 의미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의 의견이 바뀜에 따라 금세 힘을 잃는다. 집단적인 사고방식으로 보편적 의미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트렌드의 변화로 의미가 퇴색되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른 의미를 정답으로 만들고 대중은 그 의미를 따라간다.   



3. 의미는 내가 결정하자.


우리는 보편적 의미에 지배당하면서도 모두가 똑같은 생각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르게 가치판단을 한다. 사람마다 가치를 느끼는 것이 다르다. 사실 이게 진정한 사람의 본성이다.  내가 느끼는 가치는 ‘그 대상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남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가 아니다.


나에게 중요해야 의미가 있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해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꼭 남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미가 정말 나에게서 출발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 나의 직접적인 경험, 깊은 고민에서 비롯한 주체적인 의미인지, 아니면 남에게 세뇌당한 남들의 의미인지 말이다.


외부 시선을 의식하고, 대중의 눈치를 보며 정답처럼 학습한 남들의 의미는 나를 잃어버리게 한다. 나의 사고보다 남들의 사고가 더 많이 반영된 의미만을 추구하다 보면 내 진실한 마음과의 괴리를 만든다. 심지어는 내 진실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나의 주체적인 사고력을 망친다. 왜 우리는 순수한 욕망마저 남들의 욕망과 비슷한지 아닌지 눈치를 보는가? 왜 순수한 욕구를 현실적이라는 조건을 들먹이며 고개조차 들지 못 하게 하는가? 왜 나의 순수한 호기심과 판단, 의미를 잃어버리고 남들이 말하는 정답을 쫒게 됐을까?


절대적인 정답처럼 느껴지는 그것도 결국 허무하게 퇴색될 타인의 주관적인 의미에 불과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정답이라고 여겼던 그 의미들을 되돌아보자. 불과 1~2년 사이에도 문화는 급변하고, 의미도 변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수 없이 바뀐다.(불과 3~4년전에 유행하던 '워라밸','소확행'이란 단어는 어느샌가 게으름의 상징이 되고 1~2년 사이에 '파이어족', 경제적자유','부업' 같은 성실의 단어가 트랜드가 되었다.) 바람같이  사라질 한낱의 의미를 무거운 바위처럼 마음에 짊어지고 스스로 고통받지 말자. 


남들의 의미로 휘둘리지 말자. 나의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의 의미를 거대한 진리로 생각하며 내 삶을 짓누르지 않기 위해. 내 인생을 나의 의미대로 살아보기 위해 스스로 의미를 결정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나의 의미로 해석하고 나의 의식대로 바라보면 나의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남들의 의미로 해석하고 남들의 의식대로 바라보면 언제나 고상하게 포장된, 보편적으로 아름다울만한 조건들을 더 주목하게 될 것이다. 내게 그저 꽃 한 송이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남들이 아름다워하는 물질과 완벽한 인간형, 삶의 방식이 참 멋있게 보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멋있게 내 주변에 펼쳐지고 나는 끊임없이 세뇌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미디어와 대중문화 속 의미에 지배당해 나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오히려 보편의 의미는 독과 같이 나를 집어삼키고 나를 조종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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