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부터 ‘거꾸로 계단’ 세계관에 살았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면서 생각한 것이 모두 ‘거꾸로’ 이루어지는 세계다. 하교 후, 게임을 하고 싶은 날은 집에 엄마가 없었으면 했다. 그럼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야간자습을 하기 싫은 날엔 ‘야자를 너무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고, 비가 오기를 바라는 날엔 '비는 오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 법칙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 세계에 살았다.
강릉에서 묵게 될 아파트의 계단을 오르던 첫날, 오직 두려운 감정뿐이었다.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혼자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그냥 못하겠다고 다시 돌아가 버릴까. 하지만 계단에서의 걱정이 무색하게 나는 아주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다. 줄 서서 먹는 맛집도 가보고, 조금은 더운 여름 오후에 낮잠도 자고,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했다. 강릉에 눌러앉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난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떠나는 날을 4일 남겨두고, 집 앞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아늑한 분위기, 친절하신 사장님 때문에 또 오고 싶은 곳이었다. 책 한 권을 단숨에 완독 한 후, 가게를 나서며 사장님께 인사드렸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며 난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다시 오고 싶다고. 실제로... 난 그 카페를 다시 가지 못했다. 강릉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르고 싶었는데... 이게 다 거꾸로 계단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서 울컥했다. 강릉에서의 생활이 4일밖에 남지 않았다니. 이 숙소를 곧 떠나야 한다니. 그리고 문득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호스트에게 연락할만한)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호스트에게 연락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문제 없이, 우리는 침묵이 주는 평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4일만 지나면, 호스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간 나는 이번에도 당했다는 표정으로 세탁기 앞에 섰다. 그동안 멀쩡했던 세탁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세탁 시작 버튼을 누르면 E 표시가 뜨며 물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검색해보니 수리기사를 불러야 하는 문제라기에 골치가 아팠다. 더 검색해보니 혼자 해결할 수도 있었으나,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았다. 곧바로 호스트에게 연락했다. 호스트도 당황한 듯싶었으나, 다음 날 수리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주말이라 당장은 어려울 것 같다고. 빨래가 급하면 근처에 있는 코인세탁방을 이용하라고 했다. 그건 그렇게 하면 되지만, 나는 세탁기를 고치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고장 나버리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검색에 검색을 거쳐, 도어(문)를 잘 닫지 않는 경우 E 표시가 뜰 수도 있다는 글을 발견했다. 나는 곧바로 세탁기 문을 있는 힘껏 밀어 닫고, 세탁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정상적으로 물이 들어갔다. 그럴 줄 알았다. 그저 도어를 제대로 닫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아니면 거꾸로 계단이 불러온 나비효과?
이 사실을 말하니 호스트에게 말하니 아주 좋아하며 다행이라고 했다. 에어컨 빵빵 틀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침묵은 깨졌다. 호스트도 안온한 저녁을 보내길 바랐다. 시원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을 먹기를. 지금은 계단을 오르는 중이 아니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