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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Sep 28. 2022

혼자서도 잘 놉니다



나는 뭐든 혼자 하는 것이 즐겁다. 물론 함께하는 즐거움도 안다. 가족이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도 즐겁지만, 난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나를 둘러싼 것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래서 뭐든 혼자 하는 것에 도가 텄다. 혼밥, 혼영화, 혼쇼핑은 기본이고, 혼여행도 하고 있다. 이런 내가 혼자 가길 좋아하는 공간은 서점과 영화관이다. 그래서 강릉에 독립서점과 독립영화관이 있다는 것은 내게 아주 큰 행복이었다.



독립서점은 거의 내 놀이터다. 독립서점은 대형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든 작가들의 책을 만나볼 수 있고, 서점 주인의 취향이 담겨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독립서점’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도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그 모습을 발견하는 게 큰 재미다.


책이 가득 차 있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면, 책이 말을 하는 세상에 온 것 같다. 나는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한다. 그러다 좋아하는 목소리를 발견하면, 나는 천생연분이라도 만난 것처럼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책을 사고 서점 밖으로 튕겨 나온 상태다. 빨리 책을 읽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어쩔 땐 서점에서 책 안 사는 법을 전수받고 싶기도 하다..



신영극장은 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 극장이었고, 강릉독립예술극장으로 탈바꿈해 2021년 다시 문을 열었다. 독립영화 상영은 물론, 감독 특별전, 회원의 날 행사도 한다. 그야말로 강릉의 보물이다. 나는 월요일 점심,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를 보러 갔다. 제작된 지 25년 만에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 영화다.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 내용인데, 영화관에서 <큐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 관객은 나를 포함해서 5명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여자가 상담받는 장면에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아서도 짐을 정리하느라 비닐봉지를 한참 부스럭거렸다. 그리고는 앞 좌석에 두 발을 떡 하니 올렸다.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마다 “헉!”하고 리액션하셨다. 여기까진, 그래, 괜찮다.


근데... 벨소리가 울린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스피커폰이라 상대방의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린다. 우체부 아저씨인 것 같다. 할머니의 택배에 문제가 생긴 듯싶다. 지금 영화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범인을 쫓고 있는 것 같다. 곧이어 또 벨소리가 울린다. 할머니는 또 전화를 받는다. 이번에도 우체부 아저씨다. 택배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듯하다.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더니 택배 문제가 해결됐다. 다행이다. 할머니가 전화를 끊고, ‘이제 영화에 집중 좀 해볼까...’ 하니까 이미 범인이 잡혔다. 이럴 수가. 영화관에 와서 영화가 아닌 다른 거에 집중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 어이없어서 웃음이 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너무 미우면 그냥 사랑해버리라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기도 전에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다시 '푸흐흐…', 어이없어서 또 웃었다.



집에 오는 길에 잭다니엘 허니, 토닉워터, 레몬을 샀다. 하이볼을 만들어 먹으려고 사 오긴 했는데, 만들어보니 영 별로였다. 냉장고에 있던 콜라로 잭콕도 만들어봤으나 역시 별로였다. 내가 만든 건 왜 이렇게 맛이 없는 건지. 맛있게 만들어보겠다고 조제한 걸 계속 마시니까 잔뜩 취했다.

난 혼자 취하는 것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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