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아빠의 공부 동거, 벌써 일 년 - 11
지난겨울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아들네 학교는 겨울 방학을 다른 학교에 비해 늦게 시작합니다. 대신 다음 학년이 시작되는 3월 초까지가 방학입니다. 겨울 방학과 봄 방학 사이에 애매하게 등교하는 기간이 없습니다. 다음 학년을 준비하기 아주 좋은 시기이죠. 저희 아들도 3학년 선행을 달리기로 했습니다.
방학 동안의 공부는 수학과 영어를 중점적으로 했습니다. 수학은 3학년 1학기 문제집을 다 풀고, 영어는 문법 문제집을 다 푸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방학 동안은 시험 기간에 비해 성적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담이 없으므로 아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아들이 문제를 풀고 스스로 채점하도록 했습니다. 아들의 자기주도 학습 습관을 키워 주려는 의도였죠.
어느 날부터 퇴근 후 오늘 문제집 푼 것이 어떤 지 물으면 아들은 모두 다 맞았다고 하더군요.
'우리 아들이 방학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찬찬히 공부를 잘하나 보네.'
'애가 혼자서 알아서 잘하니 퇴근 후에 공부 안 봐주고 편하네.'
하루는 제가 수학 문제집을 채점했습니다. 문제집을 펴니 풀이 과정은 없고 답만 체크되어 있더군요. 저는 학창 시절 문제집이 아닌 연습장에 풀이과정을 적었는데, 아내는 문제집에 풀이 과정을 적었나 봅니다. 아내와 처음부터 공부를 했던 저희 아이들은 문제집에 직접 푸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들에게 풀이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다른 곳에 풀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보다 하고 채점을 하고 틀린 문제를 같이 풀었습니다.
며칠 뒤 퇴근 후 아들의 수학 문제집을 다시 펼쳤습니다. 또 풀이 과정 없이 답만 체크되어 있습니다. 또 물었죠. 풀이 과정은 어디 있냐고. 아들은 다른 공책에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져오라고. 공책을 찾으러 아들은 방에 들어가고, 저는 거실에서 문제집 답을 맞힙니다. 늘 다 맞았다고 하던데, 제가 채점하는 날은 왜 틀리는 것일까요? 당최. 느낌이 이상합니다. 전 날 풀었던 부분을 채점해 봅니다. 맞았다고 동그라미 쳐져 있는 문제의 답이 틀립니다. 아~~~~ 영어 문제집도 펼칩니다. 답을 다시 맞힙니다. 맞았다고 동그라미 쳐져 있는 문제의 답이 틀립니다. 아~~~~ 풀이 과정이 적힌 노트를 가지러 간 아들은 쭈볏쭈볏 방을 나오면서 "죄송하다" 합니다.
믿었던 아들에게 제대로 발등 찍혔습니다. 공부하기 싫었던 아들은 문제집은 대충 풀고, 채점도 그냥 다 맞았다고 한 것이죠. 이때가 1월이 거의 다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개학하기 전 3학년 1학기 진도를 다 나가겠다는 목표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방학 한 달 동안의 귀중한 시간을 그냥 소비한 꼴입니다. 퇴근 후 편안함에 취해 있던 저는 영어와 수학 문제집을 처음부터 다시 채점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풀릴까도 생각했습니다만 그래도 틀린 문제만 풀어야 개학하기 전에 진도를 뽑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꽤 진도가 나갔던 문제집을 다시 채점하고, 틀린 문제를 하루 공부 분량대로 다시 풀었습니다. 방학 동안에 야심 차게 진행했던 선행학습은 도돌이표를 맞아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글재주가 변변찮아 그날의 제 심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겠네요. 아들과의 공부 동거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들의 손을 놓으면 아들 혼자 다시 힘들어할까 걱정이 됐습니다. 제 업보라 생각하고 다시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교훈 하나는 가슴에 새긴 채로요.
그날 이후 답안지는 공부 공간과 떨어진 곳에 비치하고 아무리 제가 힘들어도 채점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