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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소리 없는 세상의 소리

by Dr Ryan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시력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이다”

-헬렌 켈러



‘사회적 낙인(social stigma)’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때로는 아주 조용하게, 때로는 뚜렷하게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사회현상입니다. 많은 연구는 낙인이 단순히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수준을 넘어, 개인의 자아 형성과 집단의 정체성에도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주죠. 이러한 낙인은 청각장애인들에게 무겁게 작용합니다. 사회적 배제, 자아정체성의 혼란, 건강 서비스 접근의 불균형 같은 문제들은 단지 청력의 손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회적 낙인에서 비롯된 고통이 됩니다.


혹시 '청각 장애'나 '보청기' 같은 단어를 떠올렸을 때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나요? 아마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거나 미지적인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공간에 발을 디딜 때처럼, 막연한 느낌과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함께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낙인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단지 기술이 좋아지고 법과 제도가 개선된다고 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요? 결국 이 문제는 사회 전체의 인식과 문화를 바꾸는 일이며,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변화의 조짐도 보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디어 속에서 청각장애가 점점 더 자주, 그리고 깊이 있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약자’로서가 아니라,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죠. 이 글에서는 미디어 속 청각장애의 다양한 모습과 그것이 사회적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탐색해 보고자 합니다.


현실을 입은 영웅

이 글을 쓰며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2021년 공개된 마블 드라마 <호크아이>였습니다. 마블 유니버스 속 슈퍼히어로들은 대부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누구는 신이고, 누구는 하늘을 날며, 또 누구는 몸이 신비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죠. 하지만 호크아이는 다르다. 초능력도 없고, 신도 아니며, 그저 활 하나로 싸우는 좀 강한 인간입니다. 영화 <데드풀>에서는 “난 지금 힘이 없는 상태야. 활이랑 화살만 있음 딱 호크아이라고”라는 농담이 등장하고, 마블 팬들 사이에서도 그는 팀의 최약체라는 밈 (meme)으로도 소비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어벤져스에서 빠질 수 없는 영웅이고,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매력은 오히려 현실성을 입힌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토르처럼 초인적인 능력으로 수많은 적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카타르시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쉽게 다치고, 고통을 느끼며,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는 난청이라는 뚜렷한 신체적 제약을 안고 살아갑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장치가 고장 났을 때는 심각한 혼란에 빠집니다. 이는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닙니다. 호크아이는 초인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한계를 가진 영웅이라는 인물을 통해 난청이라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조명합니다.


호크아이는 초능력 없이도 매번 싸움에 나섰고, 신체적 약점을 안고도 여전히 싸웠습니다. 도시를 파괴하는 외계인의 침공에서도, 자신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초인들을 마주해서도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그려냈죠. 기댈 건 늘 그 손에 쥔 활과 화살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해 보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그 손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계속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문학에서도 이런 인물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콰지모도는 어릴 적부터 성당의 종을 울리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큰 소리, 너무 가까운 거리. 그는 어린 시절 종류에 올라가 울려본 종소리로 인해 대부분의 청력을 잃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파리의 사람들에게 종을 울려주는 음향의 중심에 살면서도 소리와 점점 단절되어 가는 것이죠. 그가 거주하는 성당 이외의 세상과의 접촉면이 줄어들게 만든 청력의 상실은, 그가 감정과 언어로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콰지모도의 난청은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능력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의 얼굴을 추하다고 말했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어요. 그래서인지, 노트르담 대성당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보다 가장 먼저 이 귀머거리 종지기의 그림자를 기억하고 그가 울리는 종소리를 상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콰지모도는 노트르담 성당의, 아니 어쩌면 파리라는 도시의 불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청각장애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원인의 차이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타나기도 하고, 삶의 어느 순간, 다양한 이유로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귀가 안 들린다’라는 말 한마디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죠. 호크아이와 콰지모도의 경우는 소음성 난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반복적인 큰 소리 노출은 바깥 털세포, 나아가 안쪽 털세포까지 손상하면서 점점 더 심각한 난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난청이 중고도에서 고도 수준에 이르면, 보청기를 써도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워집니다. 보청기는 손상된 털세포, 특히 바깥 털세포의 역할을 대신해 소리를 키워주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안쪽 털세포까지 손상되면, 아무리 소리를 키워도 말소리를 구별하는 능력 자체가 떨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작은 기기 안에서 증폭 볼륨에는 한계가 있고, 눈치나 표정, 입 모양 같은 시각적 단서가 없으면 대화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드라마에서 연출했다시피, 호크아이는 보청기 없이 일상생활이 어렵고, 보청기가 고장 나면 심각한 불안을 겪습니다. 그리고 콰지모도는 자신이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과 동문서답을 하다가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죠. 이는 실제 많은 난청 환자들이 경험하는 매우 현실적인 상황들 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난청을 완전히 되돌릴 수 있는 치료법은 없고, 재생의학이나 유전자 치료가 가능성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임상적 적용까지는 시간이 필요해보입니다.


마블 유니버스 스튜디오의 또 다른 영화 <이터널스>에 등장하는 마카리(Makkari) 역의 배우 로렌 리들로프도 주목할 만한 사례입니다. 그녀는 실제로 청각장애인이며, 극 중에서도 수어를 통해 다른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합니다. 마카리는 초음속의 속도를 내는 능력을 지닌 이터널로서, 영화 속에서 청각장애는 그녀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죠.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내는 소닉붐을 듣지 못한다는 점은, 그녀가 그 속도를 더욱 두려움 없이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마카리는 청각 외의 감각과 수단으로 정보를 인지하고 타인과 소통합니다. 그녀의 이러한 방식은 캐릭터의 독특한 매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듣지 못함’이 결핍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는 흔히 소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지만, 마카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반응합니다. 그녀가 그려내는 영웅의 모습은,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선언처럼 다가옵니다.


상실의 갈림길 끝에서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 + 로봇>의 <히바로 Jibaro>라는 단편 애니메이션도 살펴볼 만한 작품입니다. 이 짧은 영화는 깊은 숲을 탐험하던 농인 기사가 황금 비늘을 발견하며 세이렌이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세이렌은 매혹적인 소리로 기사의 일행들을 모두 유혹해 서로 죽이도록 만들거나 익사시키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농인 기사는 살아남습니다. 이후 그는 세이렌이 가진 황금 비늘과 보석들을 탐하여 그녀를 배신하고 잔인하게 폭포 아래로 버리게 되죠. 세이렌의 시신이 호수에 가라앉자, 호수는 핏빛으로 변하고, 이를 마신 기사는 청력을 회복합니다. 들을 수 있다는 감각의 환희를 느끼는 것도 잠시, 모든 보물을 잃은 채 부활한 세이렌은 청력이 회복된 기사를 비명으로 유혹하여 호수로 끌어들이고, 결국 그는 익사하며 에피소드는 끝이 납니다. 이 짧은 서사는 청각이라는 감각이 지닌 양면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한때 그를 보호했지만, 다시 소리를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곧 파멸의 원인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청각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연출이 압도적이며, 다른 감각들보다 소리를 통해 감정과 운명을 뒤흔드는 방식이 탁월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히바로>처럼 감각의 상실과 회복을 비극적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면, 그와는 정반대 결을 지닌 영화 <청설>도 돌아볼 만합니다. 2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이 작품은 주인공들을 통해, 수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따뜻한 언어이자 관계를 맺는 아름다운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전혀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극 중 수어로 표현되는 대사들은 종종 목소리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냅니다. 손끝의 떨림, 시선의 교차, 동작의 리듬은 모두 언어 그 자체이자 감정의 파동이 됩니다. 이처럼 시각적 언어가 만들어내는 울림 위에 얹힌 배경 음악과 효과음 또한 과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며, 청각과 시각이 어우러진 감각적 서사를 완성합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 겨울과 여름은 CODA (Children of Deaf Adult), 즉 청각 장애를 가진 부모를 가진 자매입니다.


영화는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복합적인 감정과 정체성을 감각적으로 풀어내죠. 극중 언니인 ‘여름’은 청각장애가 있는 동생이 올림픽에 나가는 꿈을 응원하며 국제 수어를 배우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어렵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때 느끼는 낯섦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어 역시 구어(口語)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문법과 어휘 체계를 갖춘 하나의 독립된 자연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수어는 단지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고유한 언어적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하나의 보조 수단쯤으로 여기거나, 정식 언어로 인정하지 않는 시선을 자주 마주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문화를 언어 이전에 지워버리는 일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청설>이 보여준 따뜻한 시선처럼, 수어를 단지 ‘청각장애인의 도구’가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듯, 수어 또한 다른 언어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관계의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호크아이와 콰지모도, 마카리, 이름 없는 농인 기사와 영화 청설의 주인공들. 이들은 모두 청각장애를 지닌 인물들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들 서사 속에서 청각장애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기점이거나, 감각의 전환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그려집니다. 때로 그것은 현실적 고통과 불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능력으로 전환되며, 또 다른 경우에는 감각의 윤리적 무게를 비극적으로 조명합니다. 반면 현실 속 청각장애인은 대부분, 잃어버린 청력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무대도, 감동을 자아내는 배경음악과 편집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마치 음 소거 상태로 재생되는 드라마와 같죠. 자막은 자주 늦고, 중요한 장면에서도 청각적 힌트 없이 상황을 추측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를 오롯이 혼자서 짐작해야 하는 순간들이 일상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기기의 도움을 받고, 주변인의 표정과 몸짓을 읽고, 무엇보다 자신의 맥락 추론 능력을 발휘하며 관계를 잇습니다. 어쩌면 진짜 슈퍼히어로는 드라마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음 소거된 세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포착하고 삶을 연결해 가는 이들일지도요.


기술과 감각이 만나는 자리


이처럼 현대 미디어가 청각장애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인식의 토대가 된 역사 속 인물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청각장애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는 헬렌 켈러나 베토벤이 자주 언급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조금 다른 인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맞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전화 통신에 성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술 발명가로서보다 청각장애 교육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벨은 어릴 적부터 청각장애인 어머니의 입술을 읽으며 자랐고, 그 경험은 훗날 그가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법과 음성 훈련 기법을 개발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청각 구술법-oralism 중심 교육은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으나, 현재는 수어 사용을 지양했으며 농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는 점 역시 밝힙니다).


벨이 음성 전송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것도 청각장애 교육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화기의 발명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감각적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시도라 할 수 있어요. 이런 맥락에서 벨은 기술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감각의 차이를 이해하고 넘어서려 했던 인물이기도 한 것이죠. 그가 꿈꿨던 소리는 단지 기계 너머로 전달되는 말소리가 아니라, 장애와 비장애, 말과 침묵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무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의 업적을 기리며, 소리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데시벨(dB) 역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기억하면 좋습니다. 데시벨(dB)은 소리의 크기 등을 측정하는 단위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기려 명명된 '벨(Bel)' 단위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는 전력, 음압 등 다양한 양의 비율을 로그 스케일로 표현하는 데 널리 사용되며, 소리의 강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죠. 이처럼 벨의 이름은 단순히 전화기의 발명자를 넘어, 청각과 소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수치화하려는 노력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청각을 둘러싼 기술과 인식이 얼마나 긴밀하게 교차하며 서로를 형성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비전으로 듣는 세상의 소리


헬렌 켈러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시력이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시각의 문제를 넘어, 감각과 인식 전반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미디어 속 다양한 청각장애인의 모습은, 청각이라는 감각을 넘어서는 어떤 시선을 요구합니다. 단순히 ‘들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넘어서, 우리는 이제 다양한 소통 방식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감각의 차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하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미디어의 확장은 끊임없이 ‘소리 없는 세상’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소리’의 경계를 넓혀갑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놓여 있는 편견의 벽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언어 너머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려는 진심 어린 시도입니다. 헬렌 켈러의 말처럼, 진정으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귀의 기능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태도이며, 감각을 넘어선 마음의 열림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듣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청각장애를 단순한 결핍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들을 수 없음’은 곧 ‘소통할 수 없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협소한 기준으로 세상을 정의해 왔는지를 되묻게 합니다. 소리는 귀로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몸으로, 그리고 마음으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수어의 우아한 리듬, 진동을 통해 느끼는 음악의 감각, 표정과 시선이 얽히는 대화 등, 이 모든 것은 ‘소리 없는 소리’이며, 우리 안에 잠든 또 다른 감각을 깨웁니다. 기술은 갈수록 정교해질 것이고, 우리는 더 많은 소리를 포착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감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청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언어의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세상은 단지 소리로 채워진 공간을 넘어, 차이가 울림이 되는 공명의 장(場)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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