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책 읽기 ⑯ -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제7장.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이다. 모든 학문과 기술의 으뜸인 정치의 선은 정의다. 정의는 특정한 사물을 평등한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다 - 베블런
우리는 앞에서 대표적인 국가론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 국가론은 진보로 분류했다.
베블런은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이다." ... 사회의 진보는 생물의 진화가 그런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제도 또는 제도의 집합 안에서 산다. 그런데 모든 사회제도는 본질적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와 기능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사유습성의 산물이다. ... 지금 존재하는 모든 제도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기에 사회를 지배했던 관점과 사유습성을 재현한다. ... 과거의 사유습성이 만든 제도가 그대로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불일치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베블런에게 진보는 어떤 당위적 요구나 지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삶의 방식, 사유습성의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 진보는 피할 수도 멈출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사유습성과 생활방식, 제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다. ... 보수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 그런데 생활환견의 변화가 몰고 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마르크스가 부르주아지라고 불렀던 자본가계급을 포함하여 문명의 모든 시대를 지배했던 계급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선사했다. 유한계급은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산적 노동이 창출한 것을 약탈하고 활용한다. 유한계급은 보수주의의 몸통이다. ... 유한계급은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전통적으로 유한계급은 정치, 종교, 전쟁, 스포츠 분야에 종사한다. 정치인, 고급 공무원, 종교 지도자, 체육계 고위 인사들이 대개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가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는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진보주의에 매혹을 느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이다. 계급적 귀속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이지만 유일한 변수는 아닌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주의는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 - 김상봉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진보는 무엇인가? ...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김상봉(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 오늘날 대한민국은 부르주아계급 전체가 아니라 그 최상층부인 재벌 기업 또는 재벌 가문의 이윤 추구에 복무하는 도구가 되었다. ... 그런 자본 권력은 삼성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본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 - 이남곡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타인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베버는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폭넓게 규정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사이를 끝없이 방황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은 이념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따르자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조심스럽게 펼친 견해에 공감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국가의 텔로스(목적)는 정의 - 아리스토텔레스
국가는 모든 인간공동체의 텔로스이며, 국가가 충분히 발전해 최선의 상태에 도달하면 최고의 선과 훌륭한 삶을 실현한다. ... 법과 정의에서 이탈한 인간은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불의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이 훌륭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다. ...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그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은 민주정치가 중우정치와 참주정치 사이를 오가면서 빚어낸 폐해를 목격했기에 민주정치보다는 철인정치를 선호했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국가권력을 쥐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포퍼가 그토록 맹렬하게 플라톤을 비판했던 것을 바로 그 때문이다.
*보론 - 복지국가론
복지국가론은 철학 차원의 국가론이 아니다. 복지국가는 선을 행하는 국가의 한 형태, 또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의 분명한 결별을 의미하며, 그런 면에서 진보정치세력의 사상적·실천적 발전을 반영한다. 계급지배의 도구에 불과한 국가로 하여금 대중의 복지를 실현하게 한다는 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비추어보면 터무니없이 유치하고 낭만적인 발상이다.
흔히 가난한 사람들의 인격적 존엄성을 보장하는 데 많은 돈을 쓰는 국가를 복지국가로 이해한다.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삶의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라는 주장도 있다. ...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국가"이다. 출산, 육아, 교육, 취업, 보건, 노후 등 ...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복지국가이다.
주요 기능... 첫째, 국가의 규제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시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둘째, 조세징수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이다. 셋째, 시장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와 공동장비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다르게 표현하면 ... 첫째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둘째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안을 줄이며, 셋째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한다.
사회적 연대를 구현하는 복지정책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사회보험이다. ... 모든 시민들이 가입하여 소득에 비례하여 책정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 필요한 혜택을 누린다는 점에서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하는 제도이다.
둘째는 공적부조다. ... 어떤 국민이든 소득과 재산이 적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할 경우, 그 원인이나 책임 소재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지원을 요청할 권리를 인정한다.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다. ... 수급자가 아니라 수급권자임 ...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셋째는 보편 서비스이다. ... 의무교육 ... 무상급식 ...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삶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주자유주의자들은 작은 정부를 선호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책임을 더 중시한다. 그 사이에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진보자유주의자들이 있다. ... 개인에게만 맡길 수 없는 사회적 공동선, 기회균등,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노력과 민주적 개입을 요구한다.
제8장.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니버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독점한 유일한 인간공동체로서 국가가 지닌 힘에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한 악마성이 있다. ... 그러나 국가가 행하는 선과 악에는 한계가 없다. ... 국가가 저지르는 악은 누구도 쉽게 저지하거나 응징하지 못한다.
국가가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도덕이 개인의 내면에서 형성되는 이성적 의인인 데 반해, 국가 또는 집단을 지배하는 것은 집단적 감정과 충동이기 때문이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 개인과 국가의 행동은 상이한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 인종적·경제적·국가적 집단으로서의 개인들은 스스로 그 힘이 명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개인과 국가는 도덕적 이상이 서로 다르다.
개인이 행하는 선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다.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은 타고난 생물학적 본능이어서 가르칠 필요도 없고 칭찬할 이유도 없다. ... 그런데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누구도 이타적인 행동을 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될수록 그 집단은 더 효율적이고 강력해지며 어떠한 사회적 제도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며,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이나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과 연계를 맺게 된다.
니버는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라고 했다. ... 사회는 어쩔 수 없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 예컨대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었다. 권리, 소득, 기회, 부, 권력,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희소한 것들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다.
국가는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 실제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가진 사람들,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정의를 직접 국가에서 찾으려 하거나 국가가 직접 정의를 실현하게 할 경우, 사회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에 빠져든다.
홉스의 이론에 기대자면 헌법은 성문화된 사회계약이다.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 자유권적 기본권 ... 자유가 있다고 정의가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 없이 수립할 수 있는 정의는 없다.
권력을 배분하는 원리는 경쟁이다. ... 대통령의 권한은 국회보다 훨씬 강하다. 국가폭력의 요체인 군대와 경찰을 지휘한다. ...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어 권력을 배분받으려면 ... 정당을 만들 수 있다. ...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아도 크게 비판받지 않고 넘어간다. ... 내부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당원들의 전면적인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지도자와 공직 후보자를 선출하는 정당은 작은 진보정당뿐이다.
어쨌든 많은 득표를 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을 배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표를 많이 모으는 능력이다. 좋든 싫든, 이것 말고 다른 기준은 모두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이것보다 더 정의로운 권력배분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법부에서 통용되는 공직배분의 원리는 ... '지식의 지배'라고 할 수 있는 원리가 적용된다. 일단 사법고시에 통과하거나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으면 진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 그 사람의 철학과 인생관, 국가관과 성격이 어떠하든 특별히 문제 되지 않는다.
*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
우리 헌법은 소비자 또는 수요자의 호감을 얻기 위한 자유로운 경쟁을 부와 소득을 배분하는 기본 원리로 규정하고 있다. ...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를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의 시장은 욕망을 충족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자유로운 시장은 반드시 사회정의를 위협한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여기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목적론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국가의 목적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공정한 시장경쟁을 통해 승패가 나뉘는 경우에도 승자와 패자가 받는 보상의 격차가 너무 클 경우에는 패자가 흔쾌히 승복하기 어렵고 승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 국가는 결과의 격차를 사후적으로 보정할 책임이 있다. ... 이것이 사회보장과 사회복지를 증진할 국가의 의무이다.
*진보자유주의
보수정당 - 국가의 공안기관 - 보수언론 - 재벌대기업 - 보수지식인들이 반세기에 걸쳐 형성한 소위 주류의 지배 카르텔은 이념으로 보면 국가주의와 보수자유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명의 생명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절대주의는 정책의 수단인 국가의 강제력을 잔혹한 독재로 바꾸어버린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국가로 하여금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 진보정치는 열정을 요구하지만 '광신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제9장.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너 자신의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 - 칸트
모든 폭력이 그런 것처럼 국가폭력에도 악마성이 내재한다. ... 정치는 이처럼 악마적 힘을 가진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칸트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권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 행복을 '우리가 갖는 모든 경향성에 대한 만족'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의미의 행복을 얻는 데 필요한 실천적 법칙을 '실용적 처세의 규칙'이라고 했다. ... '경향성'은 ... '끌림', '기울어짐', '욕구'로 번역하기도 한다.
칸트의 '자유'는 ... '경향성을 만족'시키는 욕구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율적 행동이다. 도덕법은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유를 사용하는 규칙이다.
오로지 의무감에서 나온 옳은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칸트는 이성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명령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정언명령'이다. 너 자신의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면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정언명령Ⅰ) 그리고 "나 자신이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정언명령Ⅱ)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 동기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도 칸트의 도덕법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과 상충할 수도 있는 윤리의식 또한 필요하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는 오로지 동기만이 의미를 가지는 반면, 정치는 동기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결과로 책임지는 일 - 베버
베버는 국가의 본질적인 특성이 폭력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국가는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공동체이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의 자질로 세 가지를 들었다. 열정, 책임의식, 균형감각 ... 열정은 대의에 헌신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베버가 정치인의 윤리와 관련하여 종국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책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윤리는 ... 자신의 행동이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는 결과를 초래했을 때 그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울 수 없다고 본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정치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악마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갈등을 일상적인 언어로 바꾸면 원칙과 타협 사이의 갈등이 된다. ... 그런데 함부로 타협하면 원칙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는 반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면 타협을 모르는 독선적 정치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아무렇게나 타협하다 보면 '변절자'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졌지만 이긴 정치인 - 베른슈타인
하나의 가치나 이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강요된 획일주의나 지나친 보호주의는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무엇이 베른슈타인으로 하여금 수정주의와 개량주의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 자신의 이론과 자기가 하는 정치활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성찰하게 한 균형감각이었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불온하게 본다. 베블런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진보진영 안에서도, "혁신은 나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이론적으로 인간 행동의 자유에 대해서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자유주의를 도덕률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윤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어떤 것인가? ...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연합정치와 책임윤리
우리의 대통령선거는 결선투표가 없고, 국회의원 선거는 1등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들이 나름의 신념윤리에 따라 당락에 상관하지 않고 '정당하고 옳은 주장'을 국민들에게 알리겠다며 저마다 후보를 세울 경우 보수정당의 승리는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결과"가 된다. 책임 윤리에 대한 베버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이 결과는 '선거제도의 결함'이나 '어리석은 국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정당과 정치인의 책임이다.
국민은 '올바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해 줄 가능성이 있는 '능력 있는 정부'를 원했다.
앞으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세력이 연합하려면, 그 연합은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국민의 요구를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연합을 통해서만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정치세력은 유능한 집권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진보적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와 아울러 그것을 실현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받을 때 비로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국민의 정치적 소망과 요구가 다양해졌으며 정치지형이 다당제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 현행 선거제도가 지속되든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하든, 연합정치는 우리나라 정치의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맺음말. 훌륭한 국가를 생각한다.
나는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국가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안보와 치안을 잘한다 ... 안보국가 ... 국민의 물질적 생활을 풍요롭게 ... 자본주의 발전국가 ... 만인에게 자유를 보장한다 ... 민주국가 ... 실업과 빈곤, 질병, 고령, 재해와 같은 사회적 위험에서도 시민을 적극 보호 ... 복지국가 ... 이 네 가지 국가는 서로 다르지만 배척하지 않는다. 훌륭한 국가는 네 가지 모두여야 한다.
우리는 왕을 내쫓고 신분제도를 뒤엎은 민주주의혁명을 한 적이 없다.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민주공화국을 세운 다음에야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경험을 쌓았다. 역사는 귀한 것을 거저 주는 법이 없다. 남들이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치렀던 희생과 비용을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세운 후 오랜 세월 동안 치러야 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절차와 제도의 집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제도를 대하는 의식과 태도를 포함한다.
나는 이 책에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 첫째, 국가에 대해서 상충하는 요구와 기대를 가진 국민들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을 보면 경계심과 적의를 품는다. 서로를 더 잘 안다면 국가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쟁투가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증오와 적대감이 줄어들 것이다.
둘째, 진지한 정치적 관심을 북돋우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 정치인이 국민의 요구를 파악하고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려면 소통하고 교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시민들도 정부와 정당, 정치인에게 자신의 요구를 투영하려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태도로 정치인을 관찰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