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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우연 입니다 Oct 30. 2022

(1) 40살과 8월, 그리고 덴마크

2022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쓰다

어떻게 하면 잘 노는지는 알았지만, 어떻게하면 공부 잘 하는지는 몰랐던 나는 늘 스스로 "공부머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되어서야 공부를 못하는 나에게 두가지가 없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는 동기부여. 

선천적으로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움직이는 나는, 왜 해야하는지 명확한 이유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눈꼽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게 바로 공부였던것. (애매모호한 상상속 인물,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은 내겐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멀리 있는 꿈보다는 가까이 있는 재미를 찾는게 더 즐겁다)


두번째는 메타인지 제로. 

(알아도 하기 싫음 긍정의 마음으로 패스. 긍정에서 출발해 자기합리화로 끝날때가 있다. 하지만 그 합리화가 내가 그 끈을 놓지 않고 장기전으로 끝까지 걸어갈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공부 잘했던 언니가 고3 시절 혼자 중얼거린건지, 나한테 들으란건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목소리로) 이거 이거 한다음에 이 부분 맨날 틀리니까 이거 이거 더 보고 전체를 훑으면 돼.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명확하게 아는것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돌파할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머리. 그 머리로부터 메타인지가 발현된다. 나의 고딩시절은 뭐가 부족한지 찾을 필요도 없을만큼 성적인 맨 바닥이었기에 망쳤다 치더라도 최근 본 한국사 시험만을 예로 든다면, 이부분 분명 부족함을 알고 있음에도, 돌파는 커녕, 그 산이 너무 높아 스리슬쩍 피해 넘겼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일할때는 이 메타인지가 제대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성취를 위해 돌진하는 일머리는 공부머리와 다른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첫번째 동기부여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공부는 저리 치워두고, 하고 싶은일에 몰두하다 보니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열다섯해를 살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제서야 공부가 하고 싶어진걸까. 


사회 초년생, 대형 뮤지컬 기획팀원으로 시작해 결국 소극장 연극을 가장 사랑하게 된 과정,

서울을 대표하는 대형 축제를 기획하다 작은 마을의 공동체 축제속에서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 과정, 

랜드마크를 따라 다니며 여행하던 내가 작은마을의 곧 사라질듯한 문화유산들을 바라보는 여행을 하게 된 과정, 이 모든과정이 나를 다시 공부하고 싶게 만든 듯 싶다. 

큰것보다는 작은것, 먼것보다는 가까운것에 늘 아름다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왜 이 공부를 하고 싶은지의 동기부여는 이정도면 완료되었고, 이미 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겪었기에 메타인지 또한 충만한 상태라고 본다. 한치 앞도 모를 내일일을 앞세우며 잡히지 않은 성공을 위해 공부하라 밀어 부치던 험악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40이 된 나이 이런 행복의 기회를 얻지 못했겠지. 잘했다, 그 때 공부 안하길! 


삼십년 전, 열살이었던 어린이 천우연에게 누군가 앞으로 넌 어떤모습으로 살고 싶니 라고 묻는다면

들판에서 뛰어놀며 새까맣게 온 몸을 태우며 내가 놀고 싶고 내가 공부하고 싶을때 마음대로 하는 삶이라 말하겠지. 생각해 보니, 지금 이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듯. 

그리고, 삼십년 후, 70살이 된 내가 10살 그때처럼 그리던 대로 살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물론이죠' 하고 답할 수 있는 삶을 살길. 

뚜벅뚜벅, 그리 걷기 위해,

40의 끝자락, 뜨거운 여름 8월, 덴마크로 떠난다. 여행 아니고, 출장 아니고,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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