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울었고, 나는 웃었다가, 울었다.
이전에도 자주 떠났기 때문에 비슷할 줄 알았다. 그런데 좀 달랐다. 엄마는 이전보다 더 많이 슬퍼했고, 아빠는 이전보다 더 자랑스러워 했다. 언니와 동생들은 도전의 삶을 밥먹듯이 하는 내 삶에 다시한번 응원의 기도를 했고,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은 내 나이가 사십이라 조금 걱정했다. (아마도 결혼과 건강 뭐 이런것들인듯 하다.)
은평집을 정리하면서 내가 좋아했던 물건들을 이웃들과 나누고, 자주 들렀던 마을의 애착 카페와 빵집, 스시집에 들러 후회하지 않을만큼 먹었다. 집에 입주할 분을 위해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출국 시간이 열시간도 안남았다. 저녁엔 친구들이 집에와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엄마같은 나의 친구 재겸인 혹시나 내가 비행기를 놓칠까 (늦잠자서 놓친적이 있다) 집에와서 나의 마지막 밤을 챙겼다.
공항에는 올해 결혼하고 자발적 농부의 삶을 선택한 뒤 홀로 강원도 시골짜기로 이주해버린(?) 막내동생과 제부가 배웅을 왔다. 비행기에 오르기전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나눴다.
엄마는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논일에 바빴다.
너무 오랜만에 한국을 떠나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 슬픔보다는 설렘과 즐거움에 마음이 무척이나 들떴는데 엄마의 훌쩍거림에 갑자기 마음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40이 된 딸인데도 늦게 다니지 말고, 뭐든 조심하고, 잘 챙겨 먹으라 신신당부하셨다.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형편이 넉넉치 못해 학비에 보탬이 되지 못한것이 한이고 미안하다는 그 마음을 나는 안다. 자꾸 학비가 얼마냐, 장학금은 됐느냐, 덴마크는 살기에 비싸지 않느냐 수 차례 묻던 엄마의 지난 질문에 나는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다만, 엄마는 여전히 그것이 마음이 걸리나 보다.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다.
동생 다연이의 품에서 다연이 내게 건네는 기나긴 글을 읽었다.
1983년생, 153cm의 작은 몸뚱아리로 나는 60억 지구에 또 한번 몸을 던져본다.
분명 아무렇지 않았는데, 비행기가 뜨자마자 눈물이 났다.
이걸바로 나이들어 주책이라고 하는건가.
두려움과 즐거움이 겹치는 이 묘한 감정속에서 어쨌든 나는 한국을 떠나 덴마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