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0, 존재와 비존재가 공존하는 우리의 세계
새로운 시대의 관계를 모색하는 정밀한 시선
서이제 작가의 소설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디지털 시대에 나타나는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를 모색하는 소설이다. 소위 디지털 융합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트위터, 카카오톡, 유튜브 같은 플랫폼과 SNS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쌓는다. 올드미디어(신문, 잡지, 라디오, TV)에서 뉴미디어(SNS, 인터넷)로 넘어가면서 소통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문장은 정석적인 설명일지 몰라도, 적어도 서이제 작가에 한해서는 충분치 못한 설명이다. 따라서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작가가 ‘도대체 어떻게 달라졌는데?’를 집요하게 탐구한 결과를 담은 결과물로 볼 수 있다.
<바보 상자 스타>
주인공 나의 사촌형인 재호는 행방이 묘연해진 후 아이돌 그룹 원픽의 멤버 ‘일오’로 데뷔한다. 실력파 멤버이자 드라마틱한 서사를 갖춘 아이돌 일오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 등극한다. “과거 재호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는데.” 인생이 꼬일대로 꼬인 주인공 나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일오에게 열등감을 갖는다. 일오를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는 상황이 그의 열등감에 한 몫 했다. 길거리의 전광판 디스플레이에서는 일오의 광고가 나오고, TV를 틀었다 하면 ‘아이돌체조육상대회’와 ‘나 혼자 산다’에서 게스트 일오의 활약상을 접하게 된다.
상대를 향한 열등감과 상대를 향한 뒤틀린 집착은 비례 관계이듯이, 일오에게 수동적으로 노출되던 주인공 나는 점차 적극적으로 일오에 관한 콘텐츠를 찾아나선다. 고독한 윤일오방(카카오톡 오픈채팅)에 들어가서 윤일오 팬들이 공유하는 일오의 사진들을 살피고, 넷플릭스에 단독으로 공개된 원픽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연습에 매진하는 일오의 백스테이지 모습을 관찰한다. 유튜브에 게시된 방송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 축약본을 보면서 일반인과 유대감을 쌓는 일오의 훌륭한 인성을 접하기도 한다. 클릭을 거듭할수록 주인공 나는 일오는 사랑받을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고, 일오를 향한 지독한 열등감은 차츰 질투가 살짝 섞인 동경으로 변화한다.
주인공이 일오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희망적 결말로 해석할 여지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은 독자에게 짙은 서글픔을 선사한다. 주인공은 SNS와 플랫폼을 통해 일오의 재현된 형상을 접했을 뿐, 실제로 일오를 만나고 교류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일오를 하나의 실체적 존재로 보기에도 모호하다. 일오의 시점 및 내면 묘사는 소설에서 발견될 수 없다. 일오는 그저 다양한 콘텐츠와 디스플레이에서, 각 콘텐츠/시청 환경의 특성에 최적화된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주인공이 집착하고 부러워하는 대상인 일오를 과연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일오는 ‘비존재’가 아닐까. 주인공과 일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애초에 ‘관계’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게 아닌가. 주인공은 비존재의 그림자를 좇을 뿐인데 말이다. 소설이 남기는 씁쓸한 뒷맛은 독자가 디지털 시대의 관계와 존재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소설의 제목이 아이돌 스타가 아닌 ‘바보 상자’ 스타인 이유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출처 없음, 출처 있음>
이 단편은 유저가 농사를 짓는다는 ‘힐링’ 콘셉트의 가상세계, <롱스타 아일랜드>가 인기를 끄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핵심 인물인 배우 서이정은 역변과 논란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후 연예계에서 잠적하여, 롱스타 아일랜드에서 휘귀 품종인 황금튤립을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다. 투입한 시간의 결실로 세계 최초로 열매 화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평화도 잠시, 유저의 정체가 신이정이라는 사실이 사회에 알려지게 되며 그의 이미지는 게임 중독자로 낙인찍힌다. 열매 화석을 발견하여 많은 혜택을 얻고 싶었던 사람들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가며 롱스타 아일랜드를 초토화한다.
이 단편은 왜곡을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왜곡되고, 역으로 사람들이 온라인을 왜곡하기도 한다. 우선 배우 신이정은 인터넷 언론의 어뷰징/가십성 기사에 의해 왜곡된다. 신이정은 촬영장에서 연기를 위해 담배를 물었을 뿐이지만, 쇠락해가는 언론사는 어떻게든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마약 중독자 신이정 근황’ 제목의 기사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로맨틱 아일랜드의 취지를 왜곡시킨다. 자신도 신이정처럼 황금 열매를 발견해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현실에서 가상세계의 땅과 작물을 돈으로 사고판다. 소소한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유저는 더 이상 없다. 아일램드는 땅따먹기하는 유저로 인해 황폐화된다.
나아가, 사람들의 관계마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기묘한 크로스오버로 왜곡된다. 로맨틱 아일랜드의 유저인 인물은 다른 유저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인물의 애인은 가상세계의 유저에 질투를 느낀다. 실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가상 세계에서 만난 유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우습다며 비판하는 인물의 친구가 있지만, 그 역시 ‘소개팅 성공하는 방법’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수백번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돌릴 뿐 현실의 연애에서는 빈번히 실패하기만 한다. 로맨틱 아일랜드의 폐쇄는 이들의 미래에 밝지 않은 암시를 한다. 호감을 느낀 유저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인물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가상 세계 접속이 차단되었다고 해서 연인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지, 훗날 로맨틱 아일랜드가 부활한다면 현실 연애에 실패한 인물은 체념 끝에 가상 세계로 도피할지. 모든 것이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기반하고 있지 않은 가상세계의 존재와 사건이 어떤 파급력을 미치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위시리스트>
이 단편은 위시리스트에 물건을 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인 주인공의 이야기다. 직장에 치이는 주인공에게는 운동이나 독서 같은 자기계발을 할 여력이 없다. 그 대신 주인공은 위시리스트에 물건을 담는다. 초반부에 이 소설은 주인공이 지닌 욕망이 위시리스트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싶어서 미니멀리즘을 다룬 책을 담고, 체중을 감량하고 싶어 다이어트 보조제를 담고, 쾌적한 수면을 위해 아로마 향을 담는다. 그렇게 주인공의 장바구니는 쌓여간다. 평가, 구매 후기에 대한 꼼꼼한 검증을 통과한 물품들은 장바구니에서 빠져나와 주인공의 집으로 배송되지만, 주인공은 막상 그 물건들을 원래 의도대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물건들은 쓸모를 잃고 주인공의 기억에서 잊혀간다. 빈 자리는 어느새 새로운 욕망을 대변하는 물건으로 채워진다. 소설은 이용자가 의지를 발휘해 채워넣도록 만들지만 종국에는 이용자의 의지를 소진하고 마는 위시리시트 감옥과, 그 감옥에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온라인이 부추기는 욕망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소설의 문제의식은 주인공과 반대되는 문호의 등장으로 한층 깊어진다. 현실에서는 생산성 있는 일을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생산성 없는 일을 하는 주인공과 달리, 문호는 현실에서는 백수인 반면 온라인에서는 유명한 파워블로거이다. 책, 영화, 음악, 전시, 공연 등 체계적으로 분류된 카테고리 안에서 문호는 한때 소설가 지망생다운 뛰어난 문장력과 묘사력을 발휘하여 객관적으로 봐도 꽤 내용이 준수한 게시물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한다. 문화생활과 취미가 전무한 주인공은 문호를 더 이상 하찮은 존재로 보지 않으며, 문호가 추천하는 장소를 본인도 직접 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은 주말에 문호가 후기를 올린 전시를 보고 오지만, 남은 것은 영감도, 행복도, 휴식도 아닌 지독한 피로일 뿐이다. 결국 문호의 블로그 게시물도 주인공에게는 위시리스트의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탈출시킬 ‘의미 있는 무언가’가 아닌, 주인공의 위시리스트에 담기는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간절히 찾아 해맸으나 끝내 하트가 박힌 러브콘 아이스크림을 발견하지 못했던 주인공의 과거 이야기는, 위시리스트 상품 대신 의미 있는 경험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기진맥진한 상태로 방바닥에 누워버린 주인공의 현재 이야기가 맞물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하트가 영원히 담기지 못할 주인공의 위시리스트를 암시하며, 소설은 위시리스트가 은유하는 욕망의 허무한 실체와, 위시리스트에 잠식당하는 삶의 공허함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도래된 사회적 문제, 이를테면 가짜뉴스, 주의력 및 문해력 저하, 정치적 양극화를 조망한 사회과학 저서는 많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정체성, 소통, 관계, 일상 경험의 변화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조망한 책은 거의 없다. 이를 위해 처음으로 포문을 연 것이 바로 서이제의 소설 <낮은 해상도로부터>이다. 우리는 액정과 화면에 뜨는 인물, 메시지, 내용을 과연 어느 정도의 해상도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