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하나를 바라보던 순간, 잊고 있던 문방구 골목이 마음속에 열렸다. 아무 냄새도, 소리도 없던 공간에서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다이소 문구 판매대 앞에 멈춰 선, 나는 형광펜 하나를 고르면서 괜히 한참을 망설였다. 특별한 것 없는 진열대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무심히 바라보던 펜의 색깔 하나가 오래전 기억의 조약돌을 건드린 듯, 마음속 골목길에 먼지가 일었다. 그 골목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나란히 걷던 길이었고, 끝자락에는 작은 문방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던 문방구는 마치 아이들의 꿈을 숨겨둔 상자 같았다. 우리는 교과서보다 샤프를 더 오래 들여다보았고, 시험지보다 지우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게만 느껴지는 관심이, 그땐 인생의 전부였다.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친구와 나눴던 대화 속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야, 오늘 그 샤프 들어왔대." "어제 본 지우개 아직 안 팔렸겠지?" 어린 우리는 누군가를 밀쳐내는 대신, 함께 웃으며 기대를 나누는 법을 먼저 배웠다. 작은 것을 함께 바라보고, 양보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채로 어른다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문방구 옆 분식집은 기억 속에서 늘 뜨겁고 다정하다. 떡꼬치 하나에 웃음이 터지고, 육개장 사발면 국물에 하루의 피로가 풀렸다. 국물이 팔팔 끓는 소리는 마치 마음속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릇에 담긴 건 단순한 음식이었지만, 그 순간에 우리는 기쁨도 느끼고, 열망도 키우고, 때론 조용한 슬픔마저 함께 삼켰다.
분식집엔 자리에 앉을 공간조차 없었지만, 손에 든 종이컵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행복했다.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는 뜨겁고 묵직했으며, 서로의 손등을 스치며 고개를 숙이고 먹는 그 모습이 어쩐지 의식처럼 느껴졌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공간 안에서는 마음이 오갔다. 불완전하지만 순수한 교감이었다.
"나, 만화가 될 거야." "나는 선생님. 아니, 글 쓰는 사람도 좋겠어." 꿈을 말하던 그 순간, 우리는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엔 열망도 있었고,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있었다. 세상은 아직 우리에게 무르익지 않을 가능성만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때 우리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방끈 위로 떡볶이 국물이 튀었고, 입가엔 고춧가루가 묻은 채로도 진지했다. 어린 우리는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당당히 밑줄을 그었다.
혹시 당신도 그런 문방구가 있었을까. 펜 하나에 하루가 들뜨고, 떡꼬치 하나에 친구와 웃음꽃이 피어났던 시절이. 손에 쥐던 것은 작아도, 마음속에 품었던 감정들은 누구보다 크고 깊었다. 그때의 우리는 서툴렀지만 정직했고, 작았지만 단단했다. 어른이 된 지금, 점점 무뎌진 감정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의 마음이 얼마나 또렷하고 선명했는지 새삼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그런 마음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다. 어른이 되었다는 말은 감정을 잘 숨긴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오늘처럼 우연히 마주한 기억 속에서, 나는 다시금 과거의 나를 마주했다. 다이소의 펜 하나를 집어 들며, 나는 뜨거운 국물 냄새와 함께 떡꼬치를 먹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뚜껑을 열고 김이 피어오르던 순간, 분식집의 풍경이 귀에 들리고, 코끝에 닿았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순수했지만, 놀랍게도 감정은 지금보다 더 풍성했다. 작고 연약했던 나는, 누군가의 울음에 함께 눈물이 고였고, 잘못된 일에는 조심스레 화를 냈다. 부끄러운 말을 들으면 얼굴이 화끈해졌고,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면 괜히 목이 뜨거워졌다.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어린 나에게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작은 가슴 속에는 세상의 선함과 그름을 분별하려는 마음이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방구 냄새를 맡은 게 언제였을까. 떡볶이를 종이컵에 담아 들고 누군가와 나란히 걷던 기억은,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 문방구는 아직 남아 있을까. 떡꼬치를 튀기던 분식집은 여전히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모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조용히 스며들어 풍경을 바꾸는 화가처럼, 익숙한 것들을 천천히 덧칠해 버린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 떡볶이를 앞에 두고 친구와 수다를 떨던 나는 아직 내 안에 살아 있다.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웃고 있고, 가끔 이렇게 펜 하나를 통해 말없이 손을 내민다.
오늘 내 손에 남은 건 민트 형광펜 하나였지만, 마음속에선 작은 연기처럼 추억이 피어올랐다. 이 연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속에 저마다의 문방구와 분식집을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곳엔 늘 우리가 있고, 따뜻한 감정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추억들은 자주 꺼내 보지 않아도, 때때로 삶이 지칠 때 문득 스스로 불을 켜며 말을 건넨다. “괜찮아, 너의 시작은 참 따뜻했으니까.”
우리는 자라며 수많은 것을 잊지만, 펜 하나에 마음이 설레던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문방구 골목에서 떡꼬치를 들고 웃던 그 시절의 내가, 오늘 다이소 한 부분에서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가장 오래 남는 따뜻함은 거창한 순간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이 주는 다정한 회상인지도 모른다. 그 조용한 따뜻함이, 우리가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그 형광펜을 조심스레 필통 안에 넣었다. 마치 오래된 마음을 다시 꺼내 닫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