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산 하나를 꺼냈더라면 어땠을까. 마음마저 젖지 않아도 되었을까. 비 오는 날이면 창가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는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물길은 기억 속 어느 날을 따라 또르르 미끄러진다. 그 흐름 속에서 잊은 줄 알았던 하루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머릿속이 조용해지고, 그 조용함 속에서 오래 묵은 감정이 비처럼 스며든다.
나는 집에선 누워 있는 걸 좋아한다. 움직이기보단 가만히 머무는 쪽이 마음 편하다. 손 닿는 곳에 핸드폰과 따뜻한 이불이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밖에서는 다르다. 익숙한 길이라면 1시간 거리도 걷는다. 걸을수록 생각이 흐르고, 풍경 사이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영감이 불쑥 떠오르기 때문이다. 발바닥이 쉴 틈 없이 움직일수록 마음도 따라 흐른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목적지보다 과정에 귀 기울이며,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가는 방법으로.
그날도 아침 하늘은 맑았다. 비 예보는 있었지만,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을 보며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직장은 걸어서 40분 거리였다. 버스를 타도 기다리는 시간, 정류장까지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결국 비슷하다. 익숙한 출근길을 걸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일이 나에겐 더 자연스러웠다.
10분쯤 지났을 무렵, 이마에 빗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평소보다 차가운 감촉이었다. 멈춰 설까, 돌아갈까. 하지만 고작 몇 방울이었고, 금세 그칠 거란 근거 없는 확신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걷겠다는 확신이 우산보다 단단하게 나를 감쌌다.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빗방울은 금세 굵어졌다. 이마 위로 차가운 줄임표처럼 박히고,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마치 내 선택을 되묻는 소리 같았다. 몇 걸음 뒤를 걷던 학생들은 우산을 펴거나 달려갔다. 차량은 물웅덩이를 튀기며 지났고, 바지 밑단은 질척해졌다. 양말은 서서히 물을 머금었고, 어깨는 축 처졌다. 머리카락은 축축한 실타래처럼 이마를 감쌌고, 마치 젖은 마음을 가리고 싶은 듯 흘러내렸다.
축축함은 옷보다 먼저 마음에 스며들었다. 젖은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른 냄새가 오래전 기억을 끌어냈다. 장화를 신고 뛰놀다 흠뻑 젖었던 어린 시절, 그날도 처음엔 즐거웠지만 결국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다. 그 기억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지금의 나였다.
온몸이 무겁게 젖어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안으로 침잠했다. 나 자신에게 계속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어.’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현관 바닥에 물이 똑똑 떨어졌고, 동료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팀장님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걱정이 묻은 목소리에 가슴 한쪽이 묘하게 뭉클해졌다. 사수는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오는 게 어때요?”
그들의 말은 우산처럼 내 위에 펼쳐졌다. 젖은 마음 위로, 다정한 위로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말엔 아까움도, 책임감도, 그리고 어설픈 자존심도 얹혀 있었다. 월차를 쓰기엔 하루가 길었고, 이미 흠뻑 젖은 하루였다. 화장실로 들어가 휴지를 둘둘 말아 뜯었다. 뜯은 휴지로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감쌌다. 톡톡 두드릴 때마다 하루의 물기까지 함께 짜내는 기분이었다. 바짓단을 핸드드라이어 앞에 갖다 대며 거울을 마주했다. 그 안엔 초라하고 우스운 얼굴이 비쳤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괜찮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의자에 앉을 때마다 바지가 찰싹 달라붙었고, 누군가 다가올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흠뻑 젖은, 선택 속에서 마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왜 그렇게까지 걸었을까. 왜 우산 하나를 펼치지 않았을까.
그날의 선택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 끝까지 해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지고 싶지 않았던 고집까지. 그렇게 쌓인 감정은 물처럼 고여 있다가 결국 한순간에 쏟아졌다. 혼자 괜찮다고 반복하던 마음이, 그제야 조용히 허물어졌다.
이제는 안다. 때로는 돌아서야 할 때가 있다는걸. 감성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나를 지키는 일이 먼저라는 것도. 몸을 돌보는 일이 마음을 돌보는 길임을, 젖은 어깨 위에서 배웠다. 한발 물러선다고 약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다정한 선택이 가장 단단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날 이후, 나는 작은 불편 앞에서 내 마음을 먼저 살피게 되었다. 다음에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우산을 챙길 것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말해줄 것이다. 오늘은,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
비는 확신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음표 같았다. 선택의 선율이 흐트러질수록, 마음의 굴곡이 고요히 번져 나갔다. 젖어야 들리는 마음의 소리가 있다.
모든 선택은 나를 닮는다. 흘린 물기만큼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날의 비는 겉만 적시고 지나갔다. 대신, 고집 속에 숨겨둔 마음이 조용히 흘러나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