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다. 익숙함을 놓아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처럼.”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같은 길도 방향만 달라지면 엉뚱한 곳에 도착하곤 한다. 오르던 길을 내려가면 마치 거울 속 뒤집힌 세상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익숙한 골목도 시선을 살짝만 돌리면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내게 ‘길치’라며 웃지만, 나는 그런 나를 점점 인정하게 되었다. 방향은 어긋나더라도, 그 끝에서 만나는 풍경은 늘 새롭고 낯설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오늘도 길을 잃었다. 퇴근길. 나는 일부러 낯선 길로 방향을 틀었다. 똑같은 길에 질렸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엔 말랑한 공허함이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조금쯤은 어지러운 균열이 시작되길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익숙한 길을 비틀기만 해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처음엔 좋았다. 햇살은 바닐라 크림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내리쬐었고, 고소한 오트밀 우유가 속을 은근하게 데워주는 듯했다. 느긋한 걸음에 스치는 바람도 상쾌했다. 출근에 쫓기지 않는 아침은 그 자체로 선물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도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였고, 가로수 나뭇잎 하나조차 반짝여 보였다. 오늘 하루는 조금 특별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 보는 건물, 낯선 간판, 잘못 들어선 골목, 사라진 버스정류장. 익숙함이 사라지자, 불안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조용히 피어올랐다. 바닥을 흐르던 물처럼 스며든 불안은 가슴 한가운데를 서서히 적셔 왔다. ‘괜히 돌아섰나?’, ‘다시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일렁였다. 방향을 잃은 내가, 삶의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
더불어,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단절은 생각보다 더 큰 낯섦을 가져왔다. 늘 가던 편의점이 보이지 않았고, 어제까지 눈에 익었던 공원의 벤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 ‘내가 정말 아는 곳에 있는 걸까?’ 싶은 마음은, 이내 내 속을 천천히 뒤흔들기 시작했다. 때로 불안은 외로움보다 더 조용히 무너진다. 사람의 마음도 방향을 잃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다 문득, 길 끝에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리듯 시선을 돌린 순간, 연분홍 물감이 허공에 퍼지는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늘진 골목을 돌아서자마자, 벚꽃의 숨결이 나를 감쌌다. 마치 봄의 요정이 조용히 깔아놓은 비단길 같았다. 꽃잎은 햇살을 머금은 종잇장처럼 살랑이고,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사르르 소리를 냈다. 꽃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사소한 소리마저 따뜻하게 들렸다. 그 장면은 말보다 조용한 음악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멈춰 섰다. 어디론가 향해야 한다는 조급함은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에 나를 맡겼다. 꽃잎 하나가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마치 봄이 내게 남긴 짧은 쪽지 같았다. 길을 잃은 내가 멈춰 선 이 순간, 오히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느낄 수 있었다. 혼자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위로처럼 다가왔고, 벚꽃은 나를 위해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조용히 피어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들이마셨다. 내뱉은 숨은 평소보다 깊었고, 그 속엔 어쩌면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삶의 향기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그 느림은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줬다. 매일 걷던 길을 고수했더라면, 이 장면은 결코 나의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하루가 반짝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방향을 조금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길을 잃는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꼭 만나야 할 것을 향해 조용히 이끌리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낯선 풍경 앞에서 느낀 놀라움, 그다음에 찾아온 따스한 기쁨은 예고 없이 찾아온 선물처럼 마음을 물들였다. 길을 잃고서야 나는 봄을 만났고, 봄은 내 마음에도 피어났다.
삶도, 어쩌면 한 권의 지도 없는 동화책 같다.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페이지마다 뜻밖의 장면과 감정이 숨어 있다.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는 인생이 있다면, 그것은 평온할지 몰라도 반짝이지는 않을 것이다. 낯선 선택 앞에서 움츠러든 나를 위로하듯, 벚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말없이 전해주었다. 괜찮다고, 가끔은 길을 잃어도 된다고.
이제는 조금씩 생각이 달라진다. 길을 잃는 건 실패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작은 거울이고, 삶이 조용히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정답만을 향해 걷지 않아도 괜찮다고, 삶은 그 틈 사이에서 더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다고, 그날의 봄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낯선 길에서 피어난 한 장의 벚꽃처럼
삶의 반짝임은 때로 길을 잃은 그 끝에서야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