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니까, 한 걸음 물러나 줄게

by 꿈담은나현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깊은 오해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걸 너무 늦게 배운다.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멜로디처럼 가슴 한편이 따뜻하게 물든다. 스쳐 간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친구’라는 이름은 유독 특별하다. 아무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믿음, 조금은 이기적일 만큼 기대어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 가족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리. 우리는 그런 믿음에 기대어, 때로는 너무 쉽게 경계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만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친구도 결국 사람이다. 투명한 유리잔처럼 쉽게 깨질 수 있는 감정을 품고 있으며, 때로는 서늘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여린 존재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이 조심성을 잃는 순간, 보이지 않는 금이 서서히 퍼진다. 함께 걷던 거리에 조용한 틈이 생기고, 그 틈은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멀게 만든다. 서로를 향한 다정한 눈빛이 사라지는 데에는, 단 한 번의 부주의면 충분했다.

나는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매일 저무는 노을빛 아래 허둥대며 달렸고, 한순간의 망설임이 인생을 가를 것만 같은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많은 기업에 지원서를 던지며 어디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음은 늘 바닥 가까이 가라앉았고, 손에 쥔 희망은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불꽃 같았다. 어떤 하루는 초조했고, 어떤 하루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버티던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따끈한 국물 냄새가 퍼지는 식탁 위, 투명한 술잔이 부딪치며 웃음이 번졌다. 서로의 피로를 내려놓은 듯했지만, 잔이 거듭될수록 경계는 흐려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A 기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머뭇거렸던 생각들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공정과 정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맞는 일이야.”

친구가 단호히 말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답했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 작은 기회가 전부야.”


짧은 말들 속에 서툰 진심이 스쳤다. 서로의 정의가 부딪히는 순간,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감이 식탁 위를 감쌌다.


“네 말도 이해해. 하지만 사회가 변하려면…….”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 어딘가가 저릿했다. 말을 멈춘 채 술잔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우리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날 우리는. 아니 나는……. 다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대화는 한겨울 강바닥 밑으로 사라지는 조각 얼음처럼 흩어졌다. 웃으며 헤어졌지만, 손끝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잊히지 않는 서운함이 남았다. 친구와 갈라섰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마음 어딘가에 생긴 작은 금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왜 그때 상대의 입장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을까. 왜 다름을 끌어안지 못하고, 내 생각을 늦추지 못했을까. 나는 공정을 외쳤지만, 정작 마음을 보듬는 일을 소홀히 했다. 그날 밤, 조금만 더 따뜻한 침묵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너그러웠더라면, 굳이 상처를 남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정은 때로, 말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지켜내야 할 때가 있다.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멀어질 때가 있다. 나는 그걸 뒤늦게 배웠다. 그 부끄러움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친구 사이에도 거리는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숨이 막히고, 너무 멀어지면 온기가 식는다. 적당한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해하려 애쓸 때 관계는 단단해진다. 말없이 존중하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그것이 오래도록 친구라는 이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여전히 친구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문득 생각나면 안부를 묻고, 가끔은 그날 밤을 떠올리며 웃는다. '참 어렸구나.', '그때는 참 서툴렀구나.' 그렇게 지나간 감정들 위에 따뜻한 너그러움이 살포시 쌓였다.


세월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친구라서 더 조심해야 하고, 친구라서 더 다정해야 한다는 것을. 만약 비슷한 순간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말보다 미소를 먼저 건네리라 다짐한다. 다투기보다 품어주고, 정당함을 주장하기보다 다름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나의 옳음보다 너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려 할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거리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 투명한 강물 같다. 흐르는 물살은 때때로 격렬해지지만, 결국에는 다시 잔잔해진다. 다가가도 물들지 않고, 멀어져도 식지 않는 부드러운 흐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강물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따스한 마음 한 줌이, 오랜 친구라는 이름을 지켜주는 가장 단단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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