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는 못 됐지만, 말맛은 살렸습니다

by 꿈담은나현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가,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를 깨웠고, 나는 말끝을 따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평소처럼 조용히 국어 시간에 앉아 있던 그날,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멈춰 세웠다. 목소리가 참 예쁘다며, 나중에 성우를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말이었다. 평범한 수업의 끝자락에 던져진 그 말 한 줄이 내 안에서 작은 파문처럼 번져 갔다. 그 순간은 지나쳤지만, 마음 어딘가에 오래 머물렀다.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 짧은 문장이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나는 말수가 적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교실 맨 뒷자리를 좋아했고, 발표는 늘 피하고 싶었으며,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책상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말보다는 생각이 편했고, 사람들 사이의 대화보다는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가 더 나와 닮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 흐르되 드러나지 않는 투명한 존재로 지내고 싶었고, 가능한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닿으리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책을 돌아가며 읽는 시간이었고, 마침, 내 차례가 되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 없이 넘기고 싶어 최대한 또박또박 읽었다. 한 페이지를 다 읽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선생님이 말했다.


“너 목소리가 참 예쁘다. 나중에 성우 해보는 건 어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장은 천천히, 그러나 깊게 울렸다. 교실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내 안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하던 마음의 수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누군가 일부러 준비한 조언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순간 같았다. 칭찬보다 위로에 가까웠고, 기대보다는 발견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작은 불빛처럼 남아 있었다. 마치 내 안의 어딘가가 처음으로 ‘들렸다.’라고 느낀 날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내 안의 말들은 조용히 쌓여만 갔고, 겉으로는 말이 없는 아이처럼 보였지만 속에서는 무언가가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 도서관을 자주 찾게 되었고, 책을 읽는 시간이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책장을 넘기며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 속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장면을 그려 보며, 언젠가 나도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자라났다. 책을 읽는 일은 더 이상 혼자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아주 조용한 여정이었다.


언젠가부터 공책을 펴고 떠오른 장면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고 어설픈 글이었고, 정해진 줄거리도 없었지만, 단어들이 하나둘 이어지면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글을 쓰는 시간은 마음속을 천천히 산책하는 일 같았다. 낯선 길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내가 쓴 이야기를 동생에게 읽어 주었다. 망설이며 마지막 문장을 마쳤을 때, 동생이 툭 내뱉듯 말했다.


“진짜 재밌다! 계속 읽어 보고 싶어!”


그 짧은 말 속엔, 글을 읽은 사람이 진심으로 빠져들었을 때만 나오는 솔직한 감탄이 담겨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동생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언가에 빠져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몰입의 눈. 책장보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 한 사람의 진심에, 나는 조용한 확신을 얻었다. ‘내가 쓴 이야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감각이, 그때 처음으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갔다. 말 대신 글로 이야기하고, 문장으로 감정을 전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글은 나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주었고,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다독상을 받기도 했고, 글쓰기 대회에서도 몇 번 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큰 보상은 언제나, 나의 문장을 누군가가 읽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주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조용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국 성우가 되지는 않았다. 마이크 앞에 선 적도 없고, 녹음실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문장을 고르고, 단어를 다듬으며, 마음 온도를 담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성우가 되라는 권유가 아니라, 나의 목소리를 믿어 보라는 다정한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 말의 끝에서 글이라는 또 다른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다정히 말을 건넨다.


말은 공기를 지나 마음에 닿는다. 그곳에 오래 머물며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그 파문은, 오래도록 그 마음을 헤엄치며 누군가의 언어가 된다. 조용히 건네진 말 한마디는, 긴 침묵을 지나 나를 글이 되는 사람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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