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휴대전화 화면 위에 떠 있는 숫자 1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손끝에 맴돌던 말들이 몇 번이나 지워지고 다시 쓰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네 글자만 남았다. “잘 지내?”라는 짧고 단순한 문장이 말풍선처럼 조용히 떠올랐다. 옆에 붙은 숫자 1. 작은 표시 하나가 그날따라 유난히 눈에 밟혔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바쁠 수도 있고, 알림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 나도 한참이 지나서야 메시지를 확인하는 날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흘러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휴대전화 화면은 몇 번이나 켜졌다가 꺼졌지만, 숫자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주 작고 조용한 기호 하나가 내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을 눌렀다.
숫자를 들여다보며 앉아 있던 나는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주변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기장판이 미세하게 내는 윙 하는 소리, 벽시계의 또각거리는 리듬, 창문 너머 지나가는 차량의 둔탁한 진동. 평소라면 흘려보냈을 소음이 그날따라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귀에 맴돌았다. 답장이 오지 않는 시간은 공간의 결마저 바꾸는 듯했다. 눈앞의 어둠이 더 짙어졌고, 손끝은 아무 이유 없이 싸늘해졌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두고 천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시선이 머문 곳은 결국, 다시 조그만 숫자 하나였다.
예전엔 기다림이 조금은 따뜻한 일이었다.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봉투에 담고, 우체통에 넣던 그 순간. 기다림은 단지 시간이 흐르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익어가는 과정이었다. 편지가 닿기까지는 며칠이 걸렸고, 나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곤 했다. “지금쯤 내 편지를 읽고 있을까?”라는 상상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설레었고, 손끝은 가만히 떨렸다. 답장이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마음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나눈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말은 버튼 하나로 전송되고, 감정은 숫자 하나에 매달린다.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내가 무례했을까, 너무 갑작스러웠나, 아니면 더 이상 나와 연결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무렇지 않게 보낸 안부 하나가 자꾸만 마음속에서 무겁게 부풀었다. 방 안은 숨소리조차 닿지 않을 만큼 고요했고, 초침 소리만이 오래된 벽시계 속에서 시간을 긁어내고 있었다. 단조로운 소음은 마치 나에게만 들리는 듯했다.
마음속에서는 상상의 시나리오가 몇 편이고 재생됐다. 그는 지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 메시지를 보고 일부러 넘긴 걸까. 무심함과 거리감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가 보낸 말이 아직도 회신을 받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언젠가 도착할지도 모르는 진심. 하지만 도착하지 않아도 나는 그 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 순간, 숫자가 사라졌다. 짧은 안도감이 스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메시지는 읽혔지만,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닫힌 대화창과 멈춘 문장 사이에 나는 조용히 혼자 남겨졌다. 그 문 너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대답 없는 정적은 오히려 더 멀게 느껴졌다. 불 꺼진 창문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창 너머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둠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 줄의 메시지를 썼다. 무겁지 않게, 조심스럽게. 잘 지내는지, 요즘은 어떤지. 대답을 기다리기보다는 그저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말이 그의 하루 어딘가에 조용히 닿을 수 있기를, 오래된 책갈피처럼 기억의 한 모서리에 눌려 남기를 바랐다. 누군가는 무심하게 지나칠 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진심이 고여 있는 문장이었다. 반응을 기대하지 않아도, 나 자신이 진심을 보냈다는 사실이 위로되었다.
문득 떠오른다. 나도 누군가의 메시지를 열어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할 힘이 없어서. 마음이 흐릿하고, 조용히 숨만 쉬고 싶었던 날들.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는 것조차 벅차던 시간. 그때의 나는 무심했던 게 아니었다. 단지 말 없는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 지금 그 사람도 어쩌면 그런 하루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침묵을 너무 빠르게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의 오늘이 어떤지, 내 말이 도착한 그 순간의 온도는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말에는 타이밍이 있고, 마음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닿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마음이 흩어지는 건 아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말하지 못한 진심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제 안다. 답장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침묵도 하나의 감정일 수 있다는걸. 마음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다정하게 누군가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밤이 와도 나는 다시 인사를 건넬 것이다. 내 마음은 말보다 오래 머무를 테니까.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조용히 그의 하루에 가 닿았을지도 모른다. 바람처럼, 들리지 않아도 머무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