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인연은 작은 틈에서 서서히 시작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을 여는 대신 접는 법부터 익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하루는 정해진 선로처럼 반복되고, 말보다 눈치와 숨결이 먼저 오가는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가늠하며 지낸다. 그럼에도 마음 한쪽에는 아직,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은 작고 오래된 불빛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불빛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루 끝에서 숨 고를 틈도 없이 살아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배움이 자꾸 눈에 밟혔다. 도서관, 학습관, 청년 공간, 국비 지원학원을 맴돌며 신청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이 깨어났다. 회색빛 긴장감으로 시작된 자리가 어느새 레몬 빛 설렘으로 물들고,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나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그곳엔 세상의 속도와 어긋난 시간이, 오래된 레코드판처럼 나직하게 흘렀다.
처음엔 나뭇잎처럼 가볍게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수업은 천천히 무게를 품은 구름처럼 변해갔다. 과제와 발표가 겹칠수록 발보다 마음이 먼저 내려앉았고, 누군가의 안부에도 대답보다 회피가 먼저 떠오르곤 했다. 내 안은 어느새 안개처럼 가라앉고 있었고, 멈추고 싶은 마음과 걷고자 하는 마음이 조용히 밀고 당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끝에서 나는 늘, 걷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였을까.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안도감이 들곤 했다. 그들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나를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우리는 같은 강의에 귀를 기울였지만, 삶의 배경은 모두 달랐다. 그러니 오히려 이질감 속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꼭 누구여야만 하는 것도, 무엇을 이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걷는 길목마다, 인연은 발자국을 포개듯 조용히 다가왔다. 목적지 없이 떠났던 길 위에서, 마음의 틈새를 따라 불쑥 들어온 존재였다. 말도 없이 다가와 햇살처럼 옆에 머물고, 묵묵히 곁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관계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뿌리처럼 눌러앉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있다. 몇 해 전 수업에서 처음 만난 언니였다. 처음엔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지만, 어느 날 내가 지쳐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말없이 내 자리에 따스한 유자차를 놓고 갔다. 달달한 향이 코끝을 감싸며, 가라앉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안에 아주 천천히, 그러나 깊게 자리 잡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도 당시 심한 번아웃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닮은 사람을 본능처럼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말로는 다 하지 못했지만, 같은 속도로 지치고, 같은 감정의 결을 가진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분명 존재했다. 그건 배운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야만 아는 감각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책을 좋아하던 그녀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마주 앉아 읽고, 서로 다른 해석을 조심스레 주고받았다. 설명보다 침묵이, 말보다 눈빛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마음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지금은 거리가 멀어 자주 보지 못하지만, 해마다 한 번은 꼭 마주 앉는다. 오랜만인데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마음은 늘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북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벽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붙어 있었고, 우리는 서로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하나씩 골라 조용히 읽었다. 그날 우리가 함께 머문 문장은 이랬다. ‘마음이 닿는다는 건, 같은 말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그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배움을 시작하기 전, 나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았다. 익숙한 일상과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말들 안에서 편안했지만, 어느 순간 숨이 막히기도 했다. 누군가와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전혀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를 그땐 몰랐다. 지금은 안다. 그 작은 흔들림이 내 삶을 얼마나 넓히는지를.
모든 인연이 오래 머무는 건 아니다. 어떤 인연은 짧게 스치고도 오래 기억된다. 배우는 자리에서 만났지만, 끝내 한마디 말도 섞지 못한 채 지나쳐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인연조차도 내 안에 어떤 파문을 남겼다.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그날 그 순간, 우리는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되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배움이 있었고, 그 곁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인연은 손등을 스치는 봄 햇살 같았고, 어떤 인연은 뿌리를 내려 자리를 내어준 나무 같았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아도, 책장을 넘기며 나눈 고요한 순간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그 나직한 울림들이 내 삶의 결을 천천히 바꾸어 놓았다. 얼굴은 바람에 쓸려 희미해졌지만, 그날 마음에 번져온 온기만큼은 여전히 따뜻하다.
가끔 누군가 묻는다. 그렇게 바쁘게 배우며 살아서 도대체 뭐가 남았느냐고. 나는 잠시 웃고, 속으로 조용히 대답한다. 사람 하나요. 그 사람이 건네준, 말보다 깊은 마음 하나요.
새로운 인연은 거창한 용기 대신, 틈을 내준 마음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배움은 내게 그 여백을 만들어주었다. 낯선 자리에서 나눈 한마디, 함께 넘긴 책장 하나. 결국 인생을 틔운 건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들키지 않게 건네진 조용한 진심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