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길인데, 왜 두 번째는 눈물이 날까

by 꿈담은나현


숨은 쉬고 있었지만,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자꾸만 흐릿해졌다. 하루는 유리창에 김 서린 듯 뿌옇게 흘렀고, 웃음소리는 먼바다의 파도처럼 멀게만 들렸다. 사람들의 말은 마음 가장자리에 조용히 가라앉았고, 말이 겹겹이 쌓일수록 숨은 점점 더 얕아졌다.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걸까.” 고장 난 시계처럼, 같은 질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됐다.


그 시기, 내가 향한 곳은 양평의 용문사였다. 무교인 나에게 불교는 익숙한 신념이 아니었지만, 고요함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끌렸다. 세상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숨 쉬는 그곳이, 그저 필요했다. 뚜벅이인 나는 두 발로 오래된 골목과 낯선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길 위에선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고, 걷는 속도만큼 마음의 속도도 천천히 풀려나갔다.


버스 안에서는 ‘말하는 대로’가 흐르고 있었다. 익숙한 가사였지만, 그날따라 더 절실하게 들렸다.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조용해지기를.' 그렇게 바라며 눈을 감았다.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지나갔고, 머릿속의 생각들도 조금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섞이지 않는 공간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말하지 못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절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잠시 멈춘 듯 조용했다. 방은 작고 비어 있었고, 손에서 놓인 핸드폰은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웠다. 창밖에서 바람이 스쳤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오래된 현악기의 첫 울림처럼 느리게 퍼졌다. 커튼 틈으로 스며든 빛은 방 안을 따뜻한 노란 빛으로 물들였고, 나는 그 안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을 배워가고 있었다. 분주한 일상에서는 허락되지 않던 여백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모닥불이 피워졌다. 불꽃은 붉은 숨을 내쉬듯 조용히 살아 움직였고, 사람들은 말없이 그 곁에 모여들었다. 감자 하나가 낯선 사이를 데워주었고, 말보다 온기가 먼저 돌았다. 누구도 눈빛을 들이밀지 않았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별들은 유난히 가까웠고, 빛은 마음속 어딘가를 조용히 건드렸다.


그곳에선 아무도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규정하지 않았고, 존재만으로도 괜찮다는 묵언의 위로가 있었다. 불안했던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 자리에 낯선 평온이 찾아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던 내가, 처음으로 편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밤, 나는 깨달았다. 이 침묵은 나를 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채우기 위한 틈이었다는 것을.


며칠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예전과 같은 공간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덜 휘청였고, 빠르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나만의 리듬을 지켜보려 애썼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안에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은 듯했다. 다시 흔들릴 수는 있어도,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는 희미한 확신 같은 것. 템플스테이는 나를 바꾼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다시 꺼내볼 수 있게 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시 용문사를 찾았다. 마음속 물결이 잦아든 뒤였다. 일상은 여전히 반복되었지만, 더 이상 그 안에 갇혀 있진 않았다. 길도 같고, 버스도 같았다. 절의 풍경도 스님의 말씨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맞았다.


이번엔 천천히 걸었다. 연못 위 분홍빛 연꽃이 햇살에 투명하게 흔들렸고, 바위틈의 이끼는 조용히 안부를 건넸다. 길가에 핀 작은 흰 꽃들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했던 풍경들이 이토록 반가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바뀌니, 같은 곳도 다르게 다가왔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내가 낯설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는 그대로였지만, 이번엔 가슴보다 등 뒤를 가만히 쓸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도망치듯 떠났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 되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하늘도 그대로였는데, 눈물이 고였다. 분명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말로 붙잡고 싶진 않았다. 그 눈물은 아픔의 무게보다, 다 지나왔다는 안도의 온도에 가까웠다.


사람들 틈에서도 혼자라는 감각은 여전히 찾아오지만, 이제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로움이 찾아와도, 그걸 안고 걸어갈 힘이 생겼다. 같은 길이어도, 같은 공간이어도 마음의 방향에 따라 풍경은 달라진다. 내가 마주한 세상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그렇게, 나는 어제의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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