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게 보내온 오래된 편지

by 꿈담은나현


가끔은 너무 조용한 하루가 말을 건넨다. 평소라면 흘려보냈을지도 모를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남았다. 봄과 여름 사이 어딘가,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는 부드러웠다. 창밖 하늘엔 연한 파랑과 미색 구름이 얇게 겹쳐 있었고, 몸의 피로보다 마음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마음은 잔잔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무기력과 끝없이 따라붙는 피로감이 하루를 무겁게 눌렀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밖을 보는 일조차 지쳤다. 그러다 문득, 오늘만큼은 무언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오이도행 30-2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 풍경은 무심한 듯 흘러가고, 사람들의 숨결과 기계음이 공간을 채웠다. 공단 지대를 지나며 회색빛 건물들이 조용히 멀어질 때쯤, 내 시선은 유리창에 비친 나와 마주쳤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는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오래 나를 외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오이도 정류장에 내리자, 바다 냄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은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팔을 걷어붙인 나를 조심스레 감싸안았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바닷가는 조용했고, 간간이 산책 나온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바다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비로소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말 대신 눈을 감았다. 마음이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을 뜨니 바람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수면 위 햇살은 반짝였고, 저 멀리 갈매기들이 느린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마치 마음속 파문을 따라 그려낸 풍경 같았다.


햇빛이 이마를 간질였다. 따사롭지만 오래 머물기엔 조금 뜨거워졌다. 나는 해변 근처 작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2층 창가 자리에 앉자, 시야가 확 열리며 바다가 통째로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 같았다. 커피 내음과 잔잔한 음악, 유리창에 비친 햇살까지, 그 어느 것도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바다를 바라봤다. 처음 마주한 바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지만, 지금의 바다는 주황빛 노을을 머금고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듯했다. 변한 건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었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언제나 내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내 안의 어떤 조각들이, 그 바다를 마주한 순간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조심스레 가방 속 수첩을 꺼냈다. 오랫동안 펼치지 않았던 그 공책은 오늘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겼다. 펜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깨어났다. 아마도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말들이었을 것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나답게 살아가는 것도 용기야.’

짧고 조용한 문장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그 말들을 듣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문장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말들이었다. 괜찮은 척했던 날들, 외로움을 모르는 체했던 순간들, 내 마음보다 타인의 기대에 더 귀 기울였던 시간이 수첩 위에 조용히 흘러내렸다. 나는 그제야 아주 오래된 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원망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솔직해졌을 뿐이다.


해가 기울며 바다는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섞이는 그 찰나, 마치 누군가로부터 오래된 편지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었니?'라며 조용히 안부를 묻는 듯한 색감이었다. 말 대신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이럴 때일 것이다. 바다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머물렀고, 그 자체로 충분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퇴근시간으로 붐볐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같은 풍경인데도 창밖은 전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 흔들림, 바람까지도 더는 거슬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다시 세상에 섞일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긴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을 기억하자고. 다시 무너지고 싶을 땐, 이 바다의 편지를 꺼내어 다시 읽겠노라고.


그날, 나는 어떤 거창한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래 붙잡고 있던 물음을 놓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온기를 내어주는 법, 불완전한 나를 그냥 두는 법,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바다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사람들은 종종 먼 곳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만, 진짜 위로는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가장 먼 여행은, 가까운 곳에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니까.


그날의 나는, 바다가 건넨 오래된 편지 한 장을 마음 깊숙이 접어 넣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 읽어야 할 날이 온다면, 오늘의 나처럼 고요히 앉아 다시 그 파도 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나에게 돌아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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