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잠시 멈춘 세계였다

떠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도착한 순간들

by 꿈담은나현

새벽빛이 공항 유리창을 타고 조용히 번졌다. 하루가 막 시작되려는 시각,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줄지어 늘어선 카트를 밀며 출국장으로 향하고, 절차를 마친 뒤 면세점 안을 천천히 걸었다. 향수병을 손등에 살짝 뿌리며, 아직 열지 않은 하루를 향해 향기를 미리 남겨두는 듯했다. 이른 아침의 공항은 시계가 조금 느리게 흐르는 착각을 해주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담고 사는 풍경과 달리, 우리는 유독 여유로웠다. 사람들의 걸음도 다급하지 않았고, 매장 안 직원의 목소리도 부드럽게 눌려 있었다. 공항 전체가 낮은 숨결로 고요히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가벼운 아이쇼핑을 마치고 가장 넓은 로비에 다다랐다. 창이 크게 나 있어 햇빛이 공간 깊숙이 스며들었고, 의자들은 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출국 게이트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고, 우리는 햇살이 잘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손목엔 향수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고, 옆으론 저마다 다른 표정을 가진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없이 머문 고요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젖힌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누군가는 다리를 꼬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이는 캐리어 위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었고, 할머니는 생수병을 천천히 열어 마셨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배려하고 있었고, 그 평화가 이상하게 마음을 데웠다. 이 로비는 낯선 것들과도 조용히 어깨를 나란히 두는 공간 같았다. 어딘가로 떠나기 전의 시간이 도착보다 더 많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러던 고요 속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나는지 몰랐다. 이어폰을 낀 누군가의 음악 소리인가 싶었지만, 울림은 점점 로비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붉은 깃발이 허공을 가르며 원을 그렸고, 공연자들이 창과 칼을 손에 든 채 등장했다.


음악이 바닥을 타고 퍼지고, 사람들은 조용히 중심을 바라보았다. 칼이 공기를 자르고, 깃발은 바람보다 먼저 움직였다. 창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선을 그릴 때마다 공간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리허설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정제된 긴장감이 흘렀고, 우리는 우연히 그 순간의 관객이 되었다. 아니, 조용히 그 장면의 일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의 손이 깃발을 따라 허공에 선을 그었고, 노인은 캐리어에 몸을 기대어 그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캐리어를 끌어안은 여행객도,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멈춰 선 이도 그 순간엔 말을 잊고 있었다. 숨을 죽였다는 말보다 숨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눈빛은 중심을 향해 모였고, 음악은 로비 천장을 따라 낮게 번져갔다. 정적은 무겁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같은 숨결이 조용히 이어졌다.


나는 그 순간, 설명이 없어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누군가의 동작, 깃발의 선, 창끝의 떨림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공연자는 그저 호흡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보는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 장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없이 감정을 전하는 순간의 진실함이, 그날 공항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건 잠시였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조금만 더 보고 가면 안 돼?” 아이의 속삭임은, 나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탑승 게이트에서 울린 방송이 현실을 다시 끌어당겼다. 우리는 짐을 챙기고 일어섰다. 몸은 앞을 향했지만, 마음은 몇 걸음 늦게 움직였다. 깃발이 마지막으로 허공에 선을 긋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의 삶 한 조각이 하늘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벗어나 하늘로 떠올랐다. 창밖의 도시 불빛이 작아지고, 흰 구름이 경계를 지우듯 퍼졌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어떤 감정을 조용히 떠나보낸다는 걸 그날 알았다. 물리적인 거리보다 마음이 닿았던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내게 남은 건 여행지의 지도보다도, 공항 로비에서 머문 그 잠깐의 시간이었다. 누구의 이름도 남지 않았지만, 그날의 공기와 눈빛, 깃발의 선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아마 인연이라는 건 그렇게, 스쳐 가면서도 마음에 자국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날의 로비 한가운데에 있었기를 바란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머문 사람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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