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 알면서도, 가끔은 일부러 헤매고 싶을 때가 있다. 정해진 방향이 정답처럼 주어지는 날들 속에서 반대로 걷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들 때가 있다. 목적지보다 길 위에 잠시 머무르고 싶은 순간, 나는 발길을 멈춘다. 굳이 바쁘지 않아도 되는 날,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느리게 세상을 지나가고 싶어진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 채.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뭉근하게 번지던 중앙동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참 오랜만이었는데도 어색함은 없었다. 대화는 무겁지 않았고, 웃음은 가볍게 흘렀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른 김처럼, 우리 사이엔 따뜻한 정적이 머물렀다.
나는 종종 그런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눈가에 깃든 안도, 말없이 건네는 마음의 무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친밀함.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관계는 종종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다. 헤어지는 길목에서 마음이 조용히 일렁였다. 따뜻함 때문이었을까, 다시 혼자가 되는 조용함이 낯설었던 걸까.
카페 문을 나서자, 햇살이 거리 위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똑같은 골목, 같은 간판이었는데 방향이 달라지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한참을 서 있다가, 나는 걷기로 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도 괜찮다는 말로 자신을 달래며. 지도를 켜지 않은 채, 익숙한 거리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유리창에 비친 하늘은 옅게 흐려졌고, 오토바이 소리는 저 멀리 천천히 사라졌다. 바람이 셔츠 끝을 들어 올렸고, 행인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향수가 흘렀다. 골목 어귀에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가 잠시 나를 멈추게 했다. 모든 풍경이,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자,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삼색 털이 햇살에 반짝였고, 고요히 앉은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천천히 다가와 코끝으로 손을 건드렸다. 이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숨을 섞었다.
작은 체온이 다리를 타고 전해졌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내 무릎 곁에 몸을 기대더니, 바닥에 철퍼덕 누워 배를 드러냈다. 나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쓸어주었다. 고양이는 낮은 소리로 골골거리며 눈을 감았다.
진동은 마치 조용한 안도처럼, 온몸에 번져왔다. 우리가 그렇게 마주한 고요는 시간마저 눌러앉게 했다. 길 위에서 만난 존재와 이토록 깊은 정적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낯설고도 신기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고양이도 가만히 있었다. 침묵은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고양이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도 어쩌면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이곳에 멈춘 건 아닐까. 나는 눈동자 안에서 오래전의 나를 보았다. 아직 어딘가 불완전한, 하지만 그만큼 순한 나를.
시간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햇살은 노란빛에서 주황빛으로 물들었고, 유리창 너머 그림자는 길어졌다. 하늘은 천천히 보랏빛으로 기울고, 공기에는 저녁 냄새가 스며들었다. 낮의 소음은 사라지고, 골목은 고요한 결심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문득 스쳐 갔다. 살면서 계획대로 흘러간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원하는 길이 막혔던 순간, 돌아갔던 방향, 그 길 끝에서 만나게 된 또 다른 나. 실패라 믿었던 선택이 결국 나를 키웠던 기억. 잃었다고 생각한 길이 사실은 가장 나다운 곳으로 데려다준 셈이었다.
버스를 탔더라면 이 장면은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면, 고양이도, 조용한 오후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삶은 때때로 길을 잃어야 드러나는 풍경이 있다. 무작정 걷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어떤 마음. 기대하지 않았던 위로가 숨어 있는 자리에 나는 천천히 멈춰 섰다.
하루가 완전히 저물었다. 빛은 골목 뒤로 사라졌고, 고양이는 조용히 몸을 털고 일어섰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바람이 얼굴을 지나가며 마치 무언가를 전하는 듯했다. 말은 없었지만, 마음이 어디론가 가 닿은 듯했다.
고양이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갑작스레 텅 빈 거리와 내 옆에 남겨진 따스한 온기가 대비되어, 마음속 어딘가가 허전하게 출렁였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지만 꺼내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대로 앉아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몇 번이고 멈춰 섰고, 다시 길을 돌았다.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보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이 더 짙게 남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 걷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또 길을 잃게 되더라도, 오늘처럼 다정한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기를.
그래서일까. 요즘은 길을 잃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하루가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날의 고양이처럼, 우연한 만남과 느린 걸음이 삶을 더 다채롭게 물들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목적지가 아닌, 나 자신이 이 길의 이유였다는 걸 아주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