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잠깐, 서로의 계절이었다

by 꿈담은나현

계절은 조용히 피고 졌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남았다. 마음 한편에 스며든 잔열처럼, 조용히 남아 있었다. 바람이 스친 자리에 남은 따스함처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 깊숙한 부분을 천천히 감돌았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을 때처럼,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이 스르르 되살아났다.


대학교 2학년 여름, 나는 우연히 ‘취업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하던 나는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하는 가벼운 기대만 안고 신청서를 냈다. 그렇게 무심히 도착한 그곳에서 뜻밖의 계절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강의실엔 낯선 얼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바닥은 왁스로 윤이 났고, 형광등 불빛은 차가운 공기를 환하게 감쌌다. 벽면에는 일정표가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이력서 작성법’, ‘면접 이미지메이킹’, ‘자기소개서 실습’ 같은 단어들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어딘가 긴장된 공기 속에서, 작지만 선명한 기대감이 마음 안에 잔잔히 번져갔다.


첫날, 우리는 조 편성을 통해 어색한 한 팀이 되었다. 말수가 적은 친구, 유난히 밝은 친구, 조심스러운 말투의 친구, 그리고 나. 처음엔 서로의 거리를 재듯 낯설었지만, 하루이틀 지나며 우리는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함께 밥을 먹고, 조별 과제를 하며 나눈 짧은 말들이 점점 따스한 온도를 띠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낯섦을 건너 다정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마주치던 눈인사, 점심시간의 소소한 이야기, 서로의 자기소개서를 읽어주며 건네던 진심 어린 조언들. 작고 조용한 시간이 마음속에 물처럼 번졌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따뜻했던 나날.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인연이었다. 이름을 외우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기억하는 그런 인연.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면접용 사진을 찍던 날이다. 나는 준비해 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에서는 유난히 칙칙해 보여 거울 속 내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아무 말 없이 블라우스를 내밀었다. 깔끔한 흰색이면서 목선을 감싸는 둥근 블라우스였다.


“이게 더 잘 어울릴 거야,”


그녀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미소엔 망설임도, 계산도 없었다. 마음속 결이 고요히 들여다보인 듯한 순간이었다. 낯선 자리에서 받은 다정함이 예기치 않은 위로가 되어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사진은 졸업 후 몇 년간 내 이력서에 붙어 다녔다. 사진 속 나는, 그녀의 따뜻함을 입고 있었다.


캠프 마지막 날,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꼭 다시 보자.”라며 인사했다. 누군가는 눈가를 붉혔고, 누군가는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책상 위엔 정리되지 않은 서류가 흩어져 있었고, 강의실엔 작별의 여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흩어졌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연락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어느 날, 아침 셔틀버스를 향해 걷던 길.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 나야! 00야!”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지만, 순간 낯익은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기억은 잠시 멎었고, 그녀의 손짓만 유독 또렷했다.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멀어졌다. 나는 그저 눈으로만 배웅했다. 몇 걸음 지나쳐서야 캠프에서 함께했던 그 친구라는 걸 깨달았다. 뒤돌아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셔틀버스에 올라타 있었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린다. 캠프 건물의 하얀 조명, 블라우스를 건네던 손길, 스스로 어렴풋이 성장해 가던 마음의 결.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서로의 안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은 다른 도시에서 누군가의 동료이자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불쑥 떠오르는 미소 하나로, 한때의 계절이 다시 피어나는 것 같다. 봄은 짧았지만 분명했고, 그 순간의 다정함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인연은 찰나의 계절로 머무는 것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짧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더 깊이 새겨지는 법이다. 불안했던 시절에 건네졌던 블라우스 한 벌, 낯선 자리에서 나눴던 조심스러운 웃음, 함께 밥을 먹으며 속삭였던 작은 꿈.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결이 되었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굳이 안부를 묻지 않아도, 그날의 온기는 여전히 내 안에 머물고 있으니까. 우리는 찰나처럼 스쳐 간, 서로의 봄이었다. 그 계절은 고요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오랫동안 나를 데워주었다.


모든 인연이 오래 남을 필요는 없다. 어떤 계절은 꽃을 피우기 위해 존재하고, 어떤 사람은 그 계절처럼 내 마음에 머물다 간 것으로 충분하다. 봄은 지나갔지만, 내 안엔 아직 그 향이 남아 있다. 나는 봄의 향기를 품은 채, 조용히 나의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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