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잊었다고 믿은 인연이 불쑥 찾아와 묻는다. 마음 한구석에 눌러 두었던 이름이, 낯선 순간에 조용히 올라오는 것처럼.
그날도 평범한 퇴근길이었다. 시외버스 유리창에 노을이 길게 드리워지고, 졸음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던 무렵.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등을 건드렸다.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파문이 일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이름을 부르진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잊은 줄 알았던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른이 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심장이 한 박자 느리게, 그리고 깊게 울렸다. 그날 이후, 내 마음은 잠시 정류장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인연을 다시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도서관에 자주 들렀다.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햇살은 책장 위를 살며시 덮었고, 그 빛은 내면을 비추는 등불 같았다. 논술 동아리에서 글을 쓰며 자신을 표현했고, 해리포터나 자기계발서를 들춰 보며 나를 조금씩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날들의 끝엔 늘 그 아이가 있었다.
눈빛이 맑던 친구는 처음엔 조용히 다가왔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사람이었다. 함께 국사 과외를 듣고, 셋이 되고 넷이 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땡볕을 피해 걷던 골목길, 시험 끝나고 나누던 가벼운 농담, 손끝에 맴돌던 따뜻한 공기까지. 아무 말 없이도 편안했던 사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는 자취를 감췄다. 이유를 물을 수 없었고,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복도 끝을 맴도는 소문만이 공기처럼 떠돌았고, 묻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시간은 흘렀고, 우리 사이를 조용히 덮어버렸다. 공백은 내 마음속에 잔물결처럼 오래 머물렀다. 계절이 몇 번을 바뀌어도, 그 자리는 비워진 채였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진심이었던 마음들이 말을 잃는 순간, 나는 말 대신 그리움을 품는 법을 배웠다. 가끔은 그 아이를 떠올리며, 혼자서 마음속 사과를 건넸다. 미처 닿지 못한 배려와 묻지 못한 안부를 조심스럽게 접어 넣으며.
대학교에 들어가 먼 도시를 오가며 바쁘게 살면서도, 이상하게 그 아이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지나간 얼굴은 문득문득 마음을 흔들었고, 기억은 바람처럼 흩날리다가도 다시 내 곁에 내려앉곤 했다. 사람 사이의 공백은 시간이 흐르면 지워질 줄 알았지만, 어떤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처럼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늦은 오후였다. 시외버스 유리창 너머로 붉은 노을빛이 내 볼을 물들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버스 안은 고요했고, 멀리서 타이어가 도로를 긁는 소리만이 잔잔히 이어졌다.
“혹시……. 너, 맞지?”
고개를 돌리자, 오래전에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른이 된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은 얼굴에 흔적을 남겼지만, 마음의 본질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의 결이 달라졌다. 눈앞의 현실과 오래된 기억이 겹쳐 흐릿한 경계에 머물렀고, 나는 눈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대답했다. 짧은 순간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모든 감정이 단 몇 초 안에 번개처럼 지나갔지만, 마음속엔 천천히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오래 남았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소소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달라진 생활을 잠시 나눈 뒤, 다음에 꼭 만나자는 말과 함께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러나 약속은 흐릿하게 멀어졌고, 다시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만남은 짧았지만, 마음 한편에 오래 머물렀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교실 창가에 앉아 빛을 마시던 오후, 복도 끝에서 들리던 웃음소리, 그리고 내가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 그때의 나는 아직 미숙했지만,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그 아이는 내 안에 남아 있던 선한 마음의 조각을 다시 꺼내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인연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늘 속에서 숨을 고르다가 다시 피어나는 것이라는 걸. 그것은 단지 기억이 아닌,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이었다.
그날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나를 잊은 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재회 덕분에, 나는 고이 접어두었던 내 마음을 다시 펼칠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 문득 떠오르면, 괜히 망설이기보다 한 줄의 안부를 남겨보곤 한다. 스쳐 가는 인연 속에도,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을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어떤 인연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의미를 드러낸다.
삶은 그렇게, 놓쳤다고 믿었던 장면들이 다시 내 앞에 펼쳐지는 방식으로 나를 가르친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은 아직 살아 있고, 멀어진 사람도 언젠가는 그리움의 이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건 고마움이었다. 은은한 감동이었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에도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먼저 기억하는 인연은, 언젠가 다시 당신 앞에 피어날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모든 것을 품은 채로.
잊은 사람보다, 놓은 마음이 더 오래 내 안에 머문다. 그래서일까. 어떤 인연은, 다시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