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버스 창가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그날, 비 오는 버스 창가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시선 위에 얇고 투명한 필름을 덧씌운 듯, 창밖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일렁였다. 매일 지나던 길이었지만, 그날은 처음 마주하는 골목처럼 조용히 가슴을 두드렸다. 어쩌면 멈춰 있어야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걸,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 평생학습관까지 여유롭게 걸었다. 하늘은 자꾸 눈에 밟히고, 구름은 느릿하게 이야기를 빚어냈다. 들풀은 계절을 알려 주었고, 들꽃은 이름을 몰라도 마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까치는 전봇대 위를 리듬감 있게 옮겨 다니고, 개천 아래 오리들은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조용한 평화를 보여 주었다. 조깅하는 사람들의 일정한 호흡, 강아지와 함께 걷는 노부부의 잔잔한 대화, 자전거가 지나간 뒤 남긴 바람까지. 걷는다는 건 내게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세상과 감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걸음 속에서 문장이 떠오르고, 햇살은 어느새 주인공의 표정을 그려 주었다. 감정 하나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마음속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일상도 비 앞에서는 멈춰 선다. 축축한 운동화, 옷깃을 타고 스며드는 바람, 우산 아래로 들어온 낯선 냉기. 걷고 싶은 마음보다 피로가 먼저 밀려오는 날, 나는 버스를 선택했다.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노선. 버스 안으로 들어서자, 습기 섞인 따뜻한 공기가 숨결처럼 번졌고, 창가엔 하나의 빈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기대자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등을 타고 내려왔고, 그 차가움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창엔 또르르 맺힌 빗방울이 수천 개의 투명한 점이 되어 흘렀고, 그 너머의 세계는 수채화처럼 번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 우산을 비스듬히 들고 황급히 길을 건너는 이들. 그날의 세상은 비에 젖은 채,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스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들처럼 보일까, 누군가의 창밖 풍경 속에서. 바쁜 걸음, 굳은 표정, 잠시도 멈추지 못하는 마음들.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그들의 피로와 숨겨진 외로움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무표정한 얼굴 너머에 무거운 하루가 얹혀 있었고, 비를 맞은 어깨 위엔 말하지 못한 고단함이 앉아 있는 듯했다.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쏟아진 빗줄기 속에서 우산도 없이 전속력으로 뛰던 어느 날. 온몸이 젖은 채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섰던 나를, 누군가가 창밖에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버스 안은 조용했다. 창에 머리를 기댄 이들은 말없이 잠들어 있었고,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음악은 희미한 선율이 되어 공기를 가로질렀다. 안내 방송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공간을 갈랐고,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은 내 감각 깊은 곳까지 천천히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창밖을 응시했고, 누군가는 휴대전화 화면을 밝히며 작은 세상에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나만이 멈춰 선 사람처럼,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은 내 앞을 지나갔다. 어떤 장면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떤 장면은 오래 머물렀다. 그 사이에서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놓치고 지나친 풍경 속에, 진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여겼던 시간이 스쳐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날들, 쓸모없다고 느껴졌던 순간들. 하지만 그날, 나는 단지 앉아 있었을 뿐인데도 깊이 보고, 조용히 느낄 수 있었다. 삶은 가만히 있어도 나를 향해 다가왔고, 세상은 조용한 숨결로 내 곁에 앉았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기다림 속에 흐름이 있고, 멈춤 안에 깊이가 있다는 것을. 고요함은 때로, 어느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 준다는 것도.
버스가 종점에 가까워질 무렵, 창밖은 여전히 흐렸고 빗방울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걷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곧 그 길 위에 다시 설 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걷게 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버스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그 안은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얇은 틈 같았다. 투명한 간극 너머로 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걷지 않았지만, 문장은 떠올랐다.
뛰지 않았지만, 마음은 도착했다.
말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조용히 내 마음을 두드려 주었다.
어쩌면, 가장 깊은 움직임은
멈춤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