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했듯 나는, 아니 우리는 울보출신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우리는 눈물을 숨기고 버틸 수 있는 일종의 근력이 생기는데, 그것에 실패한 나 같은 작자는 여전히 울보라고 불리게 된다. 그 단어자체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는 않는 용어이긴해도 년에 한번은 듣는다. 올해는 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하는 과정중이었다. 교수님께 한소리 듣고 눈물이 터진 나를 위로하면서 9살 막내 동기가 '쌤은 울보야' 라고했다. 귀여워… 그리고 고마운 것이다. 속상한 기운을 없애고 얼른 울음을 멈추기 위해 딴 생각을 시도해본다.
먼저, 왜 선생님인건가.
선생에 님이라는 따블 존칭이라니. 하기야 우리는 말이다. 행정복지센터에 민증을 찾으러가도, 갑작스러운 음주단속 중에도, 발꿈치 스케일링을 받으러가도 서로 ‘선생님’하는 사이잖은가. 무례하지 않게 저기 그쪽 너 대신 쓰는 그 정도로만 생각하면 되는데도 그만 울고싶다는 마음으로 생각에 꼬리를 이어본다.
대학원에 오고 타전공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이 신기해 하는게 있다. 심리쪽에서는 서로를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는것이다. 공학과 예체능쪽에서는 선배 내지는 언니누가가 디폴트라는게 오히려 낯설었다. 대학원 사람들이 선생님이 아니면 ‘뭐’란말인가. 우리의 선생님이라는 단어에는 이쪽계열 특성상 학생들의 나이의 고저가 고루고루한 편이기도 한것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동료의식 그리고 상담사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려 나는 선생님이고 친근하고 비격식적인 사이라 쌤이라 불릴 수 있다. 따스한 일이다.
그리고, 왜 울보 인건가.
울보는 ‘울다’라는 동사에 ‘-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다. 여기서 ‘-보’는 특정한 속성이나 행동을 강조하는 접미사로, 대체로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 행동을 특징적으로 하는 사람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먹보’, ‘털보’ 같은 단어들이 있고 포켓몬중에는 하루종일 쿨쿨자고 눈이 ㅡ___ㅡ 이렇게 생긴 잠만보가 비슷한 이유로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울보라는 단어는 반복하는 행동에 대한 묘사라고 끝내기엔 단순히 우는 사람이라는 뜻보다 다양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눈물이 많은데다 감정적으로 유약하다는 듯 표현하는 비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울보의 친구들로는 느림보, 겁보, 바보들 모두 낮잡으려고 만든 단어들이다.
하지만 앞서 선생님이 만능드라이버 같은 단어로 쓰이는데 울보라고 아닐라고. 울보는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아이같다는 의미도 있지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을 가리킬 때 그리고 순박함을 보장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자기표현이 쉽고도 어려운 이시대에 자신의 유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건, 굉장히 용기있는 일인 것이다. 물론 툭하면 울고 불고 하면 쉽게 무너지고 자기조절이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울보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 얼마나 귀한지 목격해봐야 아는데. 울음은 사람 사이에 낀 얼음을 녹이고 진심을 보여줄 수 있다.
내가 본 울보들이 그랬다. 그동안 왜 연락 안했냐고 펑펑 울던 고등학교때 미술선생님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술기운속에 꼭꼭 숨겨둔 아픔을 말하며 엉엉 울던 그 애, 어렵게 꺼낸 그늘을 말씀드렸더니 대낮 카페에서 하염없이 울어주던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멘토선생님을 보면서 울보는 더 이상 나에게 비하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울보들로 인해 나는 사랑이 눈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졌고 우리의 유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의 울보라는 단어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선생님 만큼의 존중과 상냥을 느낀다. 다시 돌아봐도 그말은 너무 고마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