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차가와진다.
처서(處暑)가 지나니까 여름이 물러갈 준비를 하긴 하나보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에 있던 은행나무 옆구리에 몰래 노래진 꼬마잎을 목격했다. 낮에는 아직 먹은 척 하지만 밤에는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가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하늘이 맑고 말라가니 산불 조심하라는 안내 문자가 오고 밤에 빨래를 널어야 할 바싹 말아가는 시기, 우리 몸도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코점막이 건조 해지고 바람에 날리는 것들로 비염이 도진다.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창을 바라보니 해가 언제 졌나 싶다. 밤이 길어지면서 햇빛을 덜 쐬니 멜라토닌 분비가 줄어 생기는 계절성 우울감, 이에 따라 가을을 탄다는 이들이 등장한다. 날이 추우니까 따듯한 것을 찾게 되나 보다. 온기를 찾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두툼한 옷감으로, 길거리 간식으로 인연 속에서 찾기도 한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나 또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무진과 여름 인사를 하고 윤건과 가을에 만날 준비를 한다. 음악과 함께 계절을 보내며, 필요 없는 물건도 정리하고 기부했다. 안주로 뜨끈한 바지락탕을 찾기 시작하고 드라이클리닝 한 재킷을 꺼낸다. 수분부족 지성용 환절기 아이템도 장바구니에 넣어놨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준비해도 빠뜨리는 게 있는 법이다. 이번 가을에는 내 눈이 그것이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눈이었을 텐데 우리 눈한 데 소홀했다. 피부가 건조해지듯 눈물기도 말라간다. 펄럭이던 플라타너스 잎을 단숨에 떨구는 날 선 바람이 스치면, 눈의 수분도 금세 사라진다.
눈을 굴릴 때마다 눈알이 미안해진다. 눈알을 굴리는 방향마다 마치 녹슨 소리가 나는 것처럼, 유연하지 못하고 고장 난 로봇 팔처럼 딱딱하게 움직인다. 마치 눈을 설탕에 굴린 듯한 이물감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눈에 더 힘이 들어가 피로감이 쌓인다. 이때 할 수 있는 건 눈꺼풀이라는 셔터를 내리거나, 인공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뿐이다.
추위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무심하고 시크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어 구입한 외투를 챙기고, 상대와의 근사한 만남과 피로 회복을 위한 (타우린 짱!) 술자리를 준비하며 안주를 신경 쓰고, 스스로 볼 수 없는 얼굴을 가꾸고 꾸며댔다. 거울 앞에서도 타인을 신경 쓴 것이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anuel Levinas)는 우리 얼굴이 본질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통해 인식된다고 한 게 꼭 그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기에, 타인의 반응과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의존해 자신을 인식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내 얼굴과 표정에 신경을 썼지만, 정작 내 눈이 보내는 신호와 내가 목격할 수 있는 눈물을 놓치고 있었다. 평생을 울면서 살아온 내가 눈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다니. 이 눈이 어떤 눈인데. 죽어서도 기증할 소중한 눈알. 그리고 눈물. 명랑부터 울적까지 자기표현의 이야기를 담아낸 연장을 방치하고 있었다.
이제는 연장을 챙길 때가 왔다. 세상을 바라보고,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이 중요한 도구를 다시금 점검해야 한다고 느꼈다. 울보한테 눈은 그저 보는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표현의 척도 역할을 해주고 삶을 기록하고, 내면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창이기도 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위해 제대로 기능하도록 돌보는 것은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곧 자기(self) 돌봄의 요인인 것이다.
자기 돌봄이란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단지 외투를 걸치고 얼굴을 꾸미는 외적인 돌봄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나의 눈물과 피로감, 그리고 그 모든 신호를 알아채고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다.
매슬로(Abraham Maslow)의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자기 돌봄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아 존중과 자아실현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결국, 나의 눈을 비롯한 몸의 연장을 돌보는 작은 실천들이 이 모든 단계를 위한 첫걸음이 된다. 그것은 나를 지키고, 내가 나다울 수 있게 만드는 근간이 된다. 놀랍게도 이건 석사 들어와서 공부한 게 아니라 학부 1학년 교양 시간 때 배운 건데, 열심히 피라미드 그리면서 배운 걸 아직도 활용할 줄 모랐던 에서 겸손해진다. 어디 가서 공부한 걸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아차 또 타인을 의식하고 말았지만.
공기가 점점 차가와진다.
이번 가을, 나를 돌보는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