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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l 25. 2023

제발 좀 치우고 살자

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저와 INTP 인간은 일주일에 한 번만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놓을 수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며 집에 있는 시간도 많이 줄었고, 생활 쓰레기도 따라 줄었습니다만, 코로나가 한창이던 신혼 초에는 쓰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종 생필품이 담겨온 택배박스들도 한 짐이거니와, 특히 배달음식 용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탑처럼 쌓여가는 것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모아두었다 버리자니 쓰레기를 '정리'해 두는 일도 청소 빨래 못지않은 집안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해 두고, 택배상자는 뜯어서 줄 세워 두는 것이 온전히 제 몫이었기에 더욱 스트레스였습니다. INTP 인간은 시종일관 같이 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도와달라면 싫다 할 것은 또 아니긴 한데, 도와줘-하거나 너도 좀 해-하는 말을 하기는 싫었습니다. 왜 나는 당연히 하고 있는 것을, 너는 말해주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건데? 하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인 분리수거 쓰레기 내놓는 요일, 그 전주에 어떤 이유에선가 쓰레기를 내놓지 못한 관계로 현관 앞과 다용도실이 발 디딜 틈 없던 날이었습니다. 기필코 2주간 쌓인 쓰레기를 방출하고야 말겠다며, 늦은 밤 INTP 인간과 함께 집과 분리수거 배출장을 2번쯤 오갔습니다. 드디어 모든 쓰레기를 버린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이 INTP 인간이 마침내는 저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INTP 인간 : 으 춥다. 오늘 못 버리면 다음 주에 버리면 되는데. (여기서 이성의 끈이 끊어짐)

나 : 아니 어떻게 이 꼴을 해놓고 사냐고!! 내가 항상 정리하고 버리잖아. 제때 좀 버리라고!!!!!!!!!!!!

INTP 인간 : 헉 갑자기 왜 화를 내. 버리면 되지.

나 : 이 집안 꼴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쓰레기로 꽉 찼는데? 어떻게 이렇게 해놓고 사냐고!!!  

INTP 인간 : 내가 잘 몰랐어. 알았어. 다음 주부터는 내가 꼭 버릴게.


이 난장판이 정말 괜찮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를 꽥 지르며 분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울고 불고 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거들겠거니 했다, 하지만 너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더러운 집에서 살 순 없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들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귀찮아서, 내가 다 해주면 자기가 편하니까 내가 힘든 건 그냥 무시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 INTP 인간을 아직 다 파악하지는 못한 저의 과한 넘겨짚기이긴 했습니다. 같이 정리하는 것이 싫어서, 내 고생 따윈 아랑곳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은 아닐지언정 낮은 언덕만큼은 쌓인 쓰레기가 이 INTP 인간에게는 그다지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었죠. 그렇다 보니 저 혼자 열심히 치우고 있는 것도 잘 몰랐던 겁니다. 어떻게 이 난장판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지? 하는 생각에 기가 막히기도 하고, 의도적인 것은 아님에 한편으로는 허탈해집니다.


실은 저도 그리 집안일에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닙니다. 때 되면 치우고, 더러운 것은 버리고, 공간이 좁으니 정리하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 정도는 해야 인간답게 살지- 하는 것들만 되도록 충실히 하자 하며 살아왔습니다. 꼼꼼한 누군가가 보기엔 저 역시 대충 사는 인간일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처음에는 이 INTP 인간의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나도 꽤나 헐하게 사는 편인데,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 후로 3년을 꼬박 단 한주도 빠짐없이 분리수거는 INTP 인간의 몫입니다. 물론 꼭 새벽에 혼자 쓰레기를 한동안 정리해야 하고(그때그때 정리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버리러 나갈 때면 이어폰을 반드시 챙겨야 하는 등, 본인만의 룰이 많긴 하지만요. 보는 사람 입장에선 그냥 후딱 하고 오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부산스러울 일인가 싶습니다. 3년 간이니 쓰레기 버리는 날이 족히 100번은 넘게 되었겠습니다. 회식 때문에 귀가가 늦은 날, 너무 날이 궂은날 등에는 오늘은 못했다 할 법도 한데, 한 주를 빠짐없이 혼자서 해내고 있다는 것이 또 한편으론 신기합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럼 그전까지는 왜 그렇게까지 안 한 거야 싶기도 합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INTP 인간에게는 도열한 쓰레기들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으니까' 이겠지요.


이렇게 INTP 인간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어 보입니다.(INTP 여러분의 반박을 기다립니다!!) 결혼하며 가장 놀랐던 것도 이렇게 짐이 많은 사람은 처음 보아서 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혼자 살던 살림을 합친 것이었는데, 남편의 살림이 제 것보다 곱절은 많았습니다. 특히 많았던 것은 책과 옷, 신발, 전자기기 따위였는데, 전자기기로 말할 것 같으면 제품만 아니라 박스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중고거래를 할 요량이 있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두 찌그러지고 깨진 박스들, 제대로 켜지기나 할지 의심스러운 구식 노트북 같은, 제 눈에는 당장 버려야 할 물건들입니다.


이건 진짜 약과랍니다. (출처 : 강유미 유튜브 '좋아서 하는 채널' INTP 편)



그러나 INTP 인간은 이런 카오스에서도 좀처럼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치워야겠다 생각이 들 때 치우면 그만입니다. 자유롭고, 강박적이지 않으니 좋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같이 사는 저는 오늘도 속이 탑니다. 분리수거 쓰레기 배출 이외의 많은 분야들이 아직도 분쟁의 대상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어떤 용도인지 모를 어댑터 수십 개가 담긴 박스에서 비죽 비어져 나온 전선이 눈에 거슬립니다. 저건 언제 치울 건지 물어봐야겠습니다. 저는 언제쯤 완전히 포기하게 될까요?(포기해야만 할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Tip!

저는 INTP 인간의 방을 따로 내어주고, 그 방 문은 웬만해선 열어보지 않습니다. INTP 인간은 자기만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이 점도 보장해 주고, 지저분한 꼴을 내가 보지 않아도 되니 그것 또한 장점입니다. 치우는 것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치우고, INTP 인간이 잘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낫습니다.  


경고!

정리정돈을 잘하고 깔끔한 분이라면, INTP 인간과 가족이 되어 한 집에 사는 것을 정말 숙고하셔야 할 겁니다. 그들에겐 정리라는 개념이 생각보다 더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기 전까지 정리하지 않을 겁니다. 때가 되면 하긴 하는데 그 '때'란 것은 순전히 INTP의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이혼한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그렇게 털털한 사람이랑 사는 게 나아. 솔리드한 이불 커버에는 패턴 베개를 꼭 베야 하는 인간하고 살아봐. 더 미친다.' 아, 언젠가는 솔리드한 이불에 패턴 베개를 매칭해야만 잠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 번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INTP 인간과 살고 있습니다. 

1화 : INTP 인간과 만 3년을 살았다?(인팁인간 전격해부해 드립니다.)

2화 : 반지가 대체 왜 3개인 건데?(결혼반지 없는 결혼)

3화 : 난 그분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없어(그분들 우리 엄마 아빠랍니다.)

4화 : 제발 좀 치우고 살자(INTP 인간에게 정리정돈이란?)

5화 : INTP가 사회생활을 잘하는 이유 2가지

6화 : 네가 나랑 결혼해서 불행한 것 같아(INTP 인간이 눈물 흘릴 때)

7화 : 남편이 산후우울증에 걸렸습니다.(애는 내가 낳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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