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그림에서 시작된 저의 개인적인 상상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리스 라벨의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와 함께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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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나 뒷모습이었다. 아, 내가 그녀의 앞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이니. 그럼에도 나의 시선에는 거의 항상 그녀의 뒷모습이 발자취를 남겼다. 길을 걸을 때도 나보다 한 두 걸음씩 앞서서 걷는 그녀. 같이 책을 읽을 때도 나는 소파에, 그녀는 그 앞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는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앞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도,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모습도,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도, 나에게 익숙한 것은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참으로 조용한 여자였다. 기침 소리 한 번 크게 낸 적이 없다. 즐겨 입는 검은색 원피스, 그리고 작은 은귀걸이까지, 나는 그녀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녀의 그런 고요한 매력은 첫 만남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조용히 흘러나오는 런던의 한 카페, 그곳은 관광지와는 동떨어져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화가로서의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내가, 그날 그 카페에 들어간 것은 아마 운명이었으리라. 카페의 가장 구석자리에 파고들듯 앉아, 플랫 화이트를 한 잔 시키고 천천히 카페를 둘러보았다. 낡은 스케치북과 아무렇게나 깎인 연필을 두 손가락에 걸치고, 눈으로 카페의 여기저기를 훑던 나는, 한 곳을 응시했다. 한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여자는 검은색 면으로 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미들번으로 살짝 또아올린, 옅은 갈색빛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후에 그녀에게 그때 무슨 책을 읽고 있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읽고 있었다고. 너무나 좋아해서 수십 번은 읽은 책이라고. 나는 그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작은 카페에서 그녀의 뒤에 멀찍이 앉아 그녀의 형상을 스케치했다. 그녀를 그리는 연필은 마치 춤을 추듯이 자연스럽게 스케치북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고, 나의 마음은 점점 평안해졌다. 마치 테라스에 앉아, 떠다니는 구름과 새 한 마리가 부드럽게 비행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시끌시끌하던 나의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스케치가 완성되어 갈 즈음, 그녀는 책을 작은 가죽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를 따라 카페에서 나왔다. 아직 반도 채 마시지 못한 커피를 테이블에 두고. “당신의 뒷모습을 그렸어요.” 그녀의 발그레해진 볼, 그리고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부끄럽다는 듯이 가리던 하얀 손.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결혼하고 우리는 스트란드게이드 30번지에 살게 되었다. 그 집은 나에게 그녀와 함께 하는 빛의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무채색의 집이 어떻게 빛의 공간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무채색의 집이기에, 빛이 그 누구보다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나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집 안에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저, 필수적인 가구들과, 널찍한 창문만이 필요했을 뿐. 그녀는 햇빛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나는 창문이 큰 집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 집에 왔을 때, 그녀의 행복해하는 작은 웃음을 기억한다.
나에겐 ‘화가의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의 액자 속에는 항상 나의 그녀가 함께 했다. 그녀의 평온하고 고요한 뒷모습이. 나에겐 안정을 의미하는 그 편안한 모습이. 그녀는 내가 의자에 앉으면 그 앞에 앉곤 했다. 피아노 앞에 앉을 때도 있었고, 그저 의자에 앉아 한참을 있을 때도 있었다. 창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빛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렇게 나의 뮤즈가 되었다.
평온한 우리 집, 평온한 나의 아내, 그리고 평온한 나의 그림.
우리의 삶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운 무채색으로 칠해졌다.
우리가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을 무렵, 초봄의 따뜻한 바람이 불고, 창문으로 빛이 성큼성큼 다가오던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화가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 눈앞에는 하얀색 현관문, 그 옆엔 우리가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 큰 창문과 하얀빛에 부서질 듯 반짝거리는 커튼, 그 옆으로 내가 그린 우리의 작은 초상화 액자 두 개, 그리고 참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아내는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틀고 앞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 뒤에서 나타나,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옆을 지나쳐, 내 그림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끼어든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녀였기에, 나는 조금은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그림자를 수정했다.
5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햇살이 바닥으로 쏟아져내려 반짝거리며 빛나던, 시간이 멈추는 듯한 그 순간,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빛을 받지 않는데도 별가루가 묻은 것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그녀의 하얀 얼굴, 그리고 발그레한 두 볼과 위로 올라가 있는 그녀의 작은 입술은, 우리의 무채색의 세상에 곧, 한 방울의 색깔을 떨어트렸다.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