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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Mar 25. 2024

여덟 번째 계절, 달비

 샤미족은 여덟 개의 계절을 산다고 한다. 겨울만 해도 세 개나 된다. 겨울 되기 전 겨울, 진정한 겨울, 봄 되기 전 겨울, 이렇게 세 개다. 매우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그들의 주 생계원인 순록의 이동시기에 따라 세분해 놓았을 뿐이란다. 순록도 산과 들에 지천으로 있을 것 같으나 다 주인이 있어서 가까이 가서 풀이라도 한 번 먹이려고 하면 돈이 든다. 풀도 돈을 내야 준다. 


 북유럽 라플란드 지역의 원주민 얘기다. 겨울왕국에 나오는 노덜드라부족이 이 샤미족이다. 지금은 아메리카의 체로키부족처럼 관광업을 주로 하고 있다니 이들을 만나려면 돈이 든다. 

 겨울왕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노르웨이의 송네피요르에는 아렌델왕국의 모델이 된 작은 섬마을이 있다. 지금은 터만 남은 빈 마을이 되었지만 여전히 보겠다고 관광객이 몰려드는데 대부분의 반응은, '음?' 이거나 '어디가?'이거나 그렇단다. 여기도 피오르사파리를 이용해 배를 타고 가야 하니 돈이 든다. 가면 또 뭘 판단다. 전통 치즈나 쿠키나 그런 거다.


 흔히 상상하는 산타클로스 마을도 이들이 원조다. 핀란드가 발 빠르게 산타클로스 이야기에 샤미족의 문화를 결합해 로바니에미라는 도시에 요정들이 산다는 산타클로스빌리지를 만들었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 마을은 전체가 쇼핑몰로 꾸며져 있어서 산타할아버지를 만나려면 또 돈이 든다. 


 북유럽을 갈 뻔했던 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알다시피 그때는 내가 경험도 없었고 남이 대주는 경비라 생각도 없어서 '움직이면 돈'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였다. 가고자 했던 이유도 꽤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귀가 얇고 착하기만 한 동기들도 내가 하는 얘기들에 혹해서 그만 한겨울에 북극에를 가겠다는 당찬 기대를 품고 말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못 간 게 한 수였다. 


 동심을 파괴하려는 게 아니라 이 상업적인 부분만 거둬낸다면 라플란드는 놀라운 지역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상업적이라는 게 나쁘리는 없으나 눈을 멀게 할 수는 있다. 아마 그때 갔다면 기운만 넘치는 어리숙한 3인조는 그런 데만 둘러보다 왔을 게 틀림없다.


 사미족의 계절로 돌아가 보자. 전통적으로 그들은 차크차라고 하는 가을이 되면 집 나간 순록을 불러들이고 엘크를 사냥하고 수송아지를 잡는다. 길고 긴 겨울에 틀어박힐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순록은 서둘러 남은 습지의 풀을 뜯는다. 그러고 나면 극지의 밤이 시작된다. 달비라고 하는 여덟 번째 계절, 진정한 겨울이다. 

 북극광이 하늘을 덮으면 사람이든 순록이든 각자도생 해야 하는 때가 된다. 어차피 인생이나 록생이나 독고다이가 진리다. 


 그런 곳에 가고 싶은 게 맞냐고?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절대 아니다. 거기라면 나는 잡아둔 고기가 없으니 내 전세 보증금을 뜯어먹어야 할 거고 미루 녀석은 순록들 틈에서 이끼를 뜯어먹어야 할 거다. 묘생이든 뭐든 독고다이 각자도생이니까.

 그냥 그 지역의 겨울이 그렇다는 거고 나는 오히려 닐스 우덴베르의 책에서 위안을 얻는다. 스웨덴의 추운 겨울날 은퇴한 정신과 의사의 집에 노숙자 고양이가 이사하기로 결정한다. 미리 연통도 없었고 허락 같은 것도 필요 없다. '노인과 고양이'라는 이 책은 그렇게 노부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눌러살게 된 뻔뻔한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름도 대충 지어서 키티인 이 솜뭉치는 주인보다 더 편안하게 노부부의 집에 스며든다.


 나는 모르겠고 적어도 거기서 미루는 이끼를 뜯어먹지 않아도 된다 싶다. 이 노부부의 집같이 심심한 나라에 뻔뻔한 고양이와 함께 눌러앉아서 밤이 길디긴 여덟 번째 계절을 나는 게 지금으로서는 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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