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에 빠진 모자
뜨거운 국수를 먹던 남자를 알고 있다. 어릴 때 읽은 한 장짜리 외국 동화에 나오는 남자 얘기다. 국수는 뜨거운데 쓰고 있는 모자 끈마저 자꾸 그릇에 빠지자 이 사람은, 에잇 너나 다 먹어라,라고 하면서 모자를 국수에 처박아 버렸다. 이게 전부다.
이 동화의 제목은 어이없게도 ‘국수에 빠진 모자’였다. 주체가 남자가 아닌 모자인 것이다. 적어도 모자가 국수에 스스로 들어갔다거나, 그래서 모자가 어쨌다는 뒷 이야기라도 있어야 말이 되는 제목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황당했다. 독자가 이러니 뜨거운 국물에 빠진 것도 모자라 느닷없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모자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제목 대로 라면 이 글 역시 ‘뜨거운 국수에 빠진 모자를 알고 있다’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고 나면 나도 모자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뜨거운 국수에 처박혔고 그게 끝이다.
‘모자를 국수에 빠뜨린 사람’이라는 제목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그것도 또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동화라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교훈이라는 게 없다. 흔한 권선징악조차도 없다.
사실 국수를 먹으려던 남자와 어쩌다가 주인공이 되어버린 모자 말고는 등장인물도 없다. 분노조절이 안 됐던 사람의 말로라고 갖다 붙이고 싶은데 작가는 남자가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그럴만했다는 소리다. 결론은 이 소설은 오류다. 제목도 내용도 오류인 것이다.
이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오류 투성이의 동화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내게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나는 이 동화의 주체가 왜 모자인지를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 동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뜨거운 국수에 처박히게 된 모자의 이야기가 맞았다.
모자는 국수를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기의 끈이 자꾸 국물에 빼지는 것이 불만이었을 수 있다. 남자의 머리에서 벗겨졌을 때 모자는 자신이 뜨거운 국물에 처박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바빴다는 남자는 그대로 떠나버렸을 것이고, 그렇게 국수 국물에 빠진 채 덩그러니 남은 게 당시의 나다.
일의 여차저차는 단순하지가 않다. 잘되려고 그런 건지 안 되려고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는 점에서는 안 되려고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있던 일이 드러난 것뿐이니 꼭 안 된 일이라고는 말 못 했다. 모르고 있던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일어났다고 말하는 그 일은 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던 내가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을 알게 된 일을 말하는 거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알기 전까지는 내가 책임질 것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알게 됨으로써 나에게도 책임이라는 게 생겨버렸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엿 됐다는 거였다.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나 하는 생각이 다음에 들었고,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몇 번 하고 난 끝에서야 나만큼 황망했을 수경이 생각이 났다. 혹시 자기 얘기인 줄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다. 모든 상황이 삼단논법으로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p가 q이고 r이 p이면 r이 q인 것처럼, 새가 동물이고 닭이 새이면 닭이 동물인 것처럼, 들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얘기였다. 상황은 수학적으로 그렇고 일의 전개 역시 삼박사가 척척 맞아서, 오델로의 대사처럼 항해의 최후의 부두에 배가 닿았던 것이다.
이렇게 언수외의 조화로운 상응에 힘입어 나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