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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음 Oct 29. 2024

¶ 매뉴얼리즘 소사이어티 4

깡통 속의 정어리 게임

  나는 이 주제가 가져올 파장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가장 열광할 주제이며 열띤 공방이 예상되는 주제임에 틀림이 없었다. 케이스 수업은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거나 상담한 내용을 공유하고, 교수님의 지도하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종의 집단 슈퍼비전 형태의 수업이다. 

그러나 아직 실무 경험이 없는 학생들로서는 케이스를 찾는 일이 보통 스트레스가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수경이의 사례를 발표한 이유도 긴 토론을 유도함으로써 발표의 분량을 줄여보려는 의도 역시 없지 않았다. 예상대로 학우들이 반응은 대단했다.


“우선은, 사례자가 정말로 A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별이 중요합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사례자는 수경이고, A는 제삼자로 소개된 나다. 토론은 3학년들의 주도하에 시작부터 과열되고 있었다.

“사례자의 감정이 왜 중요합니까? 스토킹의 경우는 피해자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례자의 감정을 고려하자는 게 아니라 사례자와 A의 마주침이 정말로 우연일 경우를 배제하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례자의 감정을 단정할 단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우연한 만남은 아니라고 결정 난 거 같은데요. A가 알바를 하는 곳에 찾아오거나 회식 장소에 온 것은,”

  

나는 동방을 알바 장소로, 내 방을 회식 모임으로 바꿔 발표했었다. 수경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 방에 왔던 동기 중 하나가 사례자의 행동이 우연일 수는 없다고 단정하며 말했다. 수경이의 얘기라고는 짐작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서 나는 내심 안심이 되었었다.

“이미 사례자가 의지적으로 A를 찾아온 것이지 않습니까? 사실 카페나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도 피해자는 우연이라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사례자가 A를 일부러 찾아다녔다는 가정하에,”


가정하에라는 다른 동기의 말에 반발이 쏟아져 나왔다.

“잠깐만요, 사례자의 행동을 스토킹으로 단정하고 토론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스토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불편합니다.”

토론이 계속되면서 사례자는 스토커로 A는 피해자로 호칭이 바뀌고 있었다. 처음 가정이라는 표현을 썼던 동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토론의 경우 발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주목해 주세요. 그가 내놓은 주제는 사례자의 행동이 스토킹인지를 판별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단정해 버렸다면 이 토론은 여기서 끝나면 됩니다.”

“학우님의 말은 사례자의 행동이 스토킹이 아니라고 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공격적인 발언이 나왔다. 

“아니요,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하자는 것뿐이에요. 그가 납득할 만한 증거들을 제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설득력 있는 동기의 주장에 고조되던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 사실 이때까지 나는 좀 쫄리고 있는 중이었다. 토론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해지고 있어서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괜한 발표로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양에 '깡통 속의 정어리'라는 게임이 있다고 한다. 한 사람만 숨고 남은 사람이 전부 술레가 되는 숨바꼭질 놀이다. 술레가 숨은 사람을 찾을 때마다 그 자리에 같이 숨는다. 

점점 불어난 사람들이 마치 깡통 속의 정어리처럼 다닥다닥 숨어 있다가 마침내 술레가 한 사람만 남으면 끝이 난다. 이 토론이 딱 그랬다. 

우세하고 있는 한쪽으로 모든 의견이 모아져야 끝이 날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거세지고 있었다.

“저는 스토킹의 기준은 피해자의 관점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A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자체가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1학년 학우들이 끼어들면서 중반전이 상식적인 선에서 시작되는 듯했지만, 그러나 노련한 선배들은 이야기가 원론적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준을 피해자의 느낌에 둔다면.”

공이 다시 3학년에게로 넘어왔다.

“주먹구구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습니다. 사회규범의 문제라면 몰라도 스토킹이 경우는 법적인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느낌 같은 것만으로는 안 되지요.”

선배들이 타이르듯이 말하자, 1학년 학우 하나가 발끈했다

“선배님의 말은 피해자의 느낌만으로는 신고조차 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릴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요?”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제 얘기의 초점은, 스토킹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피해자의 느낌이 기준이 된다면 해석에 따라서 범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겁니다. 피해자가 어떻게 느꼈든 행위 자체가 범죄인 거지요.”


선배의 대답에 후배들이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면 행위를 일일이 규정하는 법 조항이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너무 많은 조항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요?”

“범법이 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명시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빠져나갈 빌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1학년 학우들의 주장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경험 부족으로 본래의 주제에서 한참을 벗어나고 있었다.

“사례자가 정말로 A를 좋아하는 거라면요? 사랑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요?” 

다른 1학년 학우가 주제 안으로 대화를 다시 끌어왔다.

“사랑하고 싶은데 단순히 표현이 미숙한 탓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A가 좀 더 적극적으로 물어봤더라면,”

그의 말을 끊으며 내 동기 중 한 명이 화가 난 듯한 엄중한 어투로 말했다.

“어떤 경우라도,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겠죠. 그러나 학우님의 생각과 상관없이 학우님의 말 자체가 잘못인 겁니다. 그것과 같아요. 어떤 이유나 변명을 대더라도 잘못과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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