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와 범죄의 재구성
삼박자의 첫 박은 내 동기인 우리 과대표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시작됐다. 이 녀석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케이스 수업'의 링크와 비번을 노출하는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링크와 비번은 이메일로 개별 전송하도록 되어 있었고, 수업의 특성상 비밀유지가 기본이었으므로 채팅방에는 공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수업 직전에서야 방이 바뀐 것을 알게 된 게 문제였다. 1학년과 3학년이 같이 듣던 수업이 분리가 되면서 1학년에게만 공지가 가고, 정작 따로 나가야 하는 우리 3학년에게는 공지가 되지 않은 것이다.
반을 분리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우리였다. 케이스 수업은 구성원들 간의 신뢰가 매우 중요했다. 내가 발표한 사례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라포형성이 전제가 돼야 했다.
그런데 갓 입학한 1학년과의 합반이라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교수님의 의도는 분명했다. 케이스 스터디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생들이 선배들에게 배울 수 있도록 매년 관례처럼 해 온 합반이라고 했다. 우리도 그렇게 배웠던 것은 맞다.
그러나 관례라는 건 없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나쁘면 바꿔야 한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좋지 않은 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신입생을 가르치는 것은 교수님이 해야 할 일이었다.
수업을 온전하게 누릴 권리가 있다는 우리의 주장을 교수님이 납득하셨고, 신학기나 돼야 분리될 줄 알았던 수업이 바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따로 공지를 받지 못한 우리는 제시간에 우르르 몰려가 로그인을 했고, 3학년 님들은 나가 달라는 1학년 대표의 정중한 요구에 우왕좌왕하며 우리 과대의 모가지를 잡고 흔들었던 것이다.
물론 랜선으로 말이다. 당황한 녀석이 조교실에 직접 문의를 해서 알아낸 새 방의 링크와 비번을 급하게 올린다는 게 채팅방을 이용해 버린 거다. 거기에라도 제대로 올렸다면 비상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으련만, 우리한 테가 아니라 제 고등학교 동기들 방으로 보내고 말았다. 메시지는 바로 삭제가 됐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이게 일이 그렇게 된 삼박자 중 두 번째 박자다. 세상에는 미친놈인데 똑똑한 놈들이 많았다. 상담심리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미친놈 소리가 웬 말인가 하겠지만 정신장애 분류상에 미쳤다는 용어는 없다. 미쳤다는 말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일군의 행동을 통칭하는 사회어가 된 지 오래다.
이들은 자기애적인 과시욕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고, 자주 자신의 행위가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동기의 동기 중 두 명이 그랬다. 이들이 똑똑하다는 증거는 삭제된 메시지를 복구했다는 사실이고, 미친놈인 증거는 삭제된 메시지를 복구했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이 무단으로 획득한 링크와 비번을 이용해 수업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것을 처음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평소에도 교수님은 우리 중 일부가 화면을 켜지 않는 것을 크게 상관하지 않으셨다. 모두 한 마디씩은 해야 하고, 랜덤으로 지명을 당하기도 하는 수업이었으므로 화면을 안 켠들 딴짓 좀 하는 게 다 이기는 했다.
다행히 수업 중에 뭐든 숫자를 세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어서 들통이 났다. 케이스 페이퍼의 오타 수에 이어 화면 수를 세던 복학생 형은 교수님께 외부인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디엠을 보냈고, 메시지를 받은 교수님이 모두 화면을 켜라고 하자 두 사람이 빠져나가는 게 목격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과성 말고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서로 연합하여 나와 연관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나였다.
사실 우리는 일이 여기서 조용히 끝나기를 바랐다. 생기는 것에 비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는 우리들의 엄마, 그러니까 우리 과대가 책임을 지겠다고 할까 봐서였다. 본인의 실수로 생긴 일이라며 대표를 관두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생각은 우리들과 달랐다. 교수님은 이 일을 비밀유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고 싶어 하셨다.
드디어 배가 부두에 닿게 되는 세 번째 박자인 것이다. 곧 담당 교수님을 발신인으로 하는 이메일이 전 학년에게 발송되었다. 수업 시간에 공개된 사례나 내용을 외부에 노출한 사실이 있는 사람은 자진해서 신고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향후 비밀유지 조항을 어긴 학생이 드러나면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와 함께였다.
교수님이 당신 것을 대신해서 문의처로 올린 조교의 폰으로 전화가 빗발쳤다. 이런이런 것도 신고를 해야 하냐는 문의 전화였다. 할 일도 많은데 뜬금없는 전화 폭격에 넋이 나갈 지경이 된 조교 형은, 자진신고 기간 내에는 선처가 있을 것이므로 일단 신고부터 하라고 일률적으로 대답했다.
‘자진신고 기간 내’라는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조교 형의 이 말에 힘입어 신고가 잇따랐다. 대부분은 사례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적용이나 학문적 내용을 공유한 것 같은 허용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내가 수업 중에 발표한 사례를 1학년 학우들이 퍼다가 자기들끼리 토론 주제로 사용한 일이 드러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부분에서 내 잘못이랄 것은 없다. 원칙에 따라 사례자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고, 장소나 시간 등 짐작을 가능케 하는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와 수업을 함께 듣던 1학년 학우들은 내 발표에 등장하는 사례자가 자신들의 동기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게 수경이에 관한 사례를 수경이가 있는 자리에서 토론 주제로 꺼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