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브라운 노이즈
수경이는 신입생 오티 때부터 남자 선배들의 눈에 들었다. 눈에 들었다는 말이 비하로 들릴 소지가 있겠으나 선후배 남녀가 초면에 눈치껏 서로를 살피던 자리였으므로 일방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1학년 여학우들 역시 누구는 얼굴이 어떻고 누구는 몸이 어떻고 하면서 남자 선배들 품평회를 대놓고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경이는 막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무쌍인데도 서글서글한 눈이 시원한 인상을 주는 아이였다.
사실 우리가 굳이 신입생 오티 자리에까지 끼어 앉아있던 이유가 그것이었으므로 나도 제일 눈에 띄는 그 후배에게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기 하나가 그녀에게 제대로 꽂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깔끔하게 포기가 되었고 그게 다였다.
나중에 그가 어설프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라 새로 마음이 일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이었던 거다.
그래서 어느 날 카페에서 그녀가 내 자리에 일부러 찾아와 아는 척을 했을 때 나는 좀 건조하게 대했던 것 같다.
“오빤 카공이 맞으시나 봐요”
인사도 없이 훅 들어온 말이었다. 처음 드는 생각은, 이게 뭐지? 하는 거였다.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않은 사이에 오빠라는 호칭도 그랬지만 그녀는 마치 내가 항상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
내가 대답도 없고 앉으라는 말도 없이 올려다보기만 하자 그녀가 선 채로 말했다.
“저는 도서관이 좋은데.”
어쩌라는 건지. 그러나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음, 거긴 너무 조용해서.”
“그렇긴 하죠. 저도 텀블러를 바꿨어요. 열 때마다 끼릭 소리가 나서요. 필통도 지퍼 없는 걸로 바꾸고. 진짜 눈치 보여.”
이쯤 되면 앉으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그건 또 에바일 수 있었다. 이 후배가 왜 여기, 내 자리에 와서 도서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도서관 2층에 백색소음실 가 보셨어요? 작은 소음을 계속 틀어준다면서요?”
“음.”
“거긴 어때요?”
“좋긴 하지, 자리가 없어서 그렇지.”
수경이는 그렇구나,라고 혼잣말같이 말하면서 올 때처럼 인사도 없이 돌아서다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오빠, 매일 여기 오시죠?”
“…”
“내일 저도 여기 와도 돼요?”
“그거야 뭐 원하면.”
“그럼 오늘처럼 4시에 올게요. 내일 또 봬요.”
그녀가 돌아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공공장소이니 그냥 오면 될 것을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 보자는 건 무슨 말인가. 각자 왔다가 만나면 인사나 나누자는 얘긴지, 아니면 얼래 불래 지금 약속이 잡혀 버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래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곧 넘겨줘야 하는 조별 과제가 코앞이었고 나는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은 딱 질색인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나는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수경이를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쯤 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우연히 마주쳤다기보다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고 해야 옳았다. 내가 매일 그 자리에서 버스를 타건만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던 데다 그녀가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 여기서 타?”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내 마음 한 곳에 일말의 미안함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타도 돼요.”
다른 곳에서 탄다는 소리다.
“….”
“오빠 카페 옮기셨어요?”
“아, 옮긴 건 아니고, 원래 돌아다녀.”
“그러셨구나.”
“...”
“사실 저 그날부터 매일 갔었거든요.”
“….”
“그냥 공부도 하고 그러려구요.”
“우리가 약속을 했었나?”
나는 괜한 오버가 될 수도 있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태도에 짜증이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냥 공부하러 간 김에.”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했고 마침 내가 타야 할 버스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분명히 아니라고 했으므로 특별히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인사 대신 눈만 한 번 마주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행동들이 일상적이지 않다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동아리방에 그녀가 찾아왔을 때였다. ‘중국의 언어와 문화’라는 레트로한 이름을 가진 우리 동아리는 중국 유학생들이 넘쳐나던 시절에 야심 차게 출발했으나, 지금은 몇 안 되는 회원들의 숙식 제공처로 전락해 망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 학기 동안 네 명의 회원이 한 문화체험활동이라고는 중국집 두 번 간 게 다였고, 다음 학기에는 인원 미달로 방을 빼앗길 예정이었다.
그래서 신입회원 한 명 들어오지 않은 동방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수치스럽게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새내기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마당에 도대체 여긴 왜 왔냐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망해가는 동아리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동아리 가입에는 뜻이 없어 보였다. 자신을 내 후배로 소개한 그녀는 우리한테는 없다고 했던 귀한 믹스커피를 두 개나 대접받고 회장 누나와 수다를 떨며 한 시간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내가 아무리 동방에서 단골로 숙식을 해결하며 고인물 소리를 듣고 있다고는 해도 하필 내가 있는 시간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방앞에 나타났다. 월세가 싼 곳을 찾아 학교에서 버스로 삼십 분 거리에 마련한 가깝지도 않은 내 방에 말이다.
혼자는 아니고 내 동기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리의 정 중앙에 섞여 내 자취방을 찾아온 것이다. 내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나의 심정을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혹시 내게 관심이라도 있는 거라면, 그래서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준다면 속 시원히 거절이라도 할 텐데 그녀는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사실 이런 생각도 웃기는 것이 그녀가 내 주위를 맴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짜로 우연히 자주 마주치는 것일 수도 있었고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 착잡하니 뭐니 하는 걸 수도 있었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내 말은 들을 생각이 없고 내 의사 역시 물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모든 혼재한 언어 중에서 나의 언어만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처리되는 불쾌감이었다.
“얘도 보드게임을 좀 한다네. 오겠다길래 같이 왔다.”
내 자취방에서 치킨을 몇 마리 시켜 놓고 밤새 보드게임이나 하자고 뭉친 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경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만 있는 자리라 불편할 텐데.”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도 그렇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나 하려고 같이 온 거예요. 나오다 선배님들을 만났길래.”
하고는 내 동기들 하나하나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주고 돌아갔다.
그게 지난달의 일이었고 내가 이 일을 사례로 발표하며 토론의 주제로 내놓은 이슈는, 이 경우 사례자의 행동을 스토킹으로 보아야 하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