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미니미노트 너의 이름은
이름 붙이기라는 것이 있다. 문제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을 아주 좋아하고 자주 사용한다.
다른 적용이기는 하지만 나는 많은 물건에 이름을 붙인다. 나에게 있어서 이름을 붙이는 일은 사물이나 감정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는 작업이다. 베개에 군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나는 불면의 밤을 자발적인 각성의 밤으로 바꾼다. 군은 어린 시절 밤마다 몰래 방으로 데려와 놀던 내 강아지 이름인 것이다.
또한 어떤 미지의 것들이 이름을 불렸을 때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많이 목격해 왔다. 그래서 나의 불안이나 공포, 긴장과 같은 감정의 역기능에도 이름이 있다.
어느 마을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아가씨가 살았다. 물레질을 잘하는 것처럼 왕을 속여서 궁궐에 들어갔지만 한 달 동안 실을 자아서 매일 열 개씩의 타래를 만들어야 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첨탑에 물레와 함께 갇혀 울고 있는 아가씨 앞에 새까맣고 꼬리가 긴 마귀가 나타나서 매일 실타래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한 달 동안 마귀의 이름을 맞히지 못하면 그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마지막 날에 극적으로 이름을 알게 된 아가씨가 큰 소리로, ‘니미니미 노트 너의 이름은 톰티트토트’라고 외치자 마귀는 놀라며 사라지고 만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는 그날 나의 정체가 드러났던 수경이와의 만남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까맣고 긴 꼬리를 손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다른 사람이 절대로 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래서 자신조차도 속이고 있던 나의 이름을 그녀가 알아맞혔을 때 나는 톰티트토트처럼 놀라서 그만 의식의 바깥으로 사라질 뻔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후 나는 고민 끝에 수경이를 만나기로 맘먹었었다. 1학년 학우들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사를 최종적으로 교수님께 전달했고, 납득할 만한 선에서 징계가 있은 후 그대로 마무리가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수경이도 알게 됐을 일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을 수는 없었다.
톡방을 몇 번 타고 들어가 연락이 닿았을 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당연하게 만남에 응했다.
“꼭 스토킹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냐, 내가 오해했던 거면 그건 미안하고.”
여러 번의 연습 끝에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말을 보탤수록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의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요, 전 스토킹이었던 거 같은데요.”
당황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오티 때 저를 계속 쳐다봤을 때요,”
그녀는 오빠라는 호칭 대신 선배라고 부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계속 쳐다보고 계셨잖아요. 그래서 선배가 저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나는 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무어라고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 틀림없이 그랬다. 내 동기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제대로 꽂혔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끊임없이 훑으면서, 내 눈에 온 열망을 담아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던 게 맞았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배한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건데, 선배가 전혀 아니라는 태도라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뜨거운 눈길로 집요하게 쳐다봐도 되는 줄 알았고, 그래놓고 모른 척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요. 선배가 먼저 말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서로 쳐다보다가 눈이 맞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아니면 그만이므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선배의 동선을 찾아다녔어요. 우연인 척 자주 마주치는 것뿐인데 그게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게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거라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고 있었던 거다.
“애들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선배를 좀 곤란하게 해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렇더라고요. 제가 선배를 함부로 대했던 거 같아요.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내리깔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차례였다. 그녀처럼 확실하고 정중하게 말이다.
나는 갑자기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일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 무지한 주제에 오만한 내가 얼마나 많은 폭력과 폭행과 범죄를 저지르며 살고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것이든 그녀와 나에게 일러줬어야 했다.
이 조심스러운 사회에서 사랑이 범죄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조목조목 가르쳐 주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