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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옥 씨 이야기 3

by 김주음

장례식장에를 못 오게 하니 참 생각이 많아져서 못 쓰겠는데 아이들이 그 속을 어찌 알까요.

노인네라도 바깥 생활이 있으니 내 손님도 만만찮은 걸 그때마다 오라 가라 하니 그게 더 고단합디다.

아까 전에도 혼자 고즈넉이 앉아서 졸다 깨다 하는데 큰애 종옥이가 전화를 했지 뭐예요.

"엄마, 영달이 아재가 왔는데 어쩌실려우? 엄마는 안 계셔도 되긴 되는데.. 며느님이 모시고 왔길래."


그 설라무네, 영달이란 사람은 우리 양반의 언제적 친구랍니다. 언제적이 언제냐면 이 양반도 언제적인지 몰라서 언제적 친구래요.

왜 살다 보면 그런 친구가 있잖아요? 학교를 같이 다닌 것도 아니고 동네 친구도 아닌데 죽마고우처럼 붙어 다닌 그런 친구요. 그렇다고 친한 것도 아니에요.

이 양반이 살았을 적에 그 친구 험을 많이 봤어요. 멱살잡이 한 것도 여러 번 봤구요. 부르기를 채신머리없이 영달이 영달이 해서 아이들도 덩달아 영달이 아재라고 부르는데,

다른 친구 이름을 찍찍 불렀으면 이 양반 성정에 호통을 쳤으련만 듣다 못한 내가,

"아버지 친구한테 누가 이름을 부르나."

하고 한 소리 할라치면 이 양반이,

"친구는 누가 친구야? 언제적 친구라고."

해요. 사실은 그래서 언제적 친구랍니다.


"어디라고 노인네 성함을. 뽄떼 없다고 욕한다. 그 양반 메누리도 왔다며."

"옆에 안 계세요. 입에 붙어서 그만. 죄송해요."

해요.

그렇잖아도 제일 먼저 달려왔을 양반이 못 오길래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던 중인데 마침 그이 메누리가 모시고 왔다니 당연히 나가 봐야지요.

이 영달이란 양반이 몇 해 전에 풍이 왔다네요. 우리집 양반이,

"내 그 자식이 그럴 줄 알았어. 맘뽀을 곱게 써야지."

하면서도 걷게 한다고 날마다 얼마나 애를 쓴 줄 몰라요. 한 일 년인가, 매일같이 차에 실어서 들로 강으로 걸린다고 다니더니 이제는 제법 오른쪽으로 지팡이를 짚고 선다고 합디다.

그러고 보니 안 친한 게 아니었네요.


두 양반이 아주 역사가 깊어요.

영달이란 사람은 본가가 서울이었답니다. 홍은동 어디 언덕에 살았다는데 우리집 양반이 대학에를 다닐 적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대요.

판자로 이은 집 비탈 골목에서 이 친구의 어머니가 연탄불에다 석쇠를 놓고 꽁치를 굽고 있더랍니다. 그게 참 이상하더래요. 분명히 날꽁치는 딱 보기에도 다 상해서 흐물흐물하고 물이 질질 흐르는데, 이게 석쇠 위에 얹어 놓으니 지글지글 노릇노릇 아주 맛나게 구워지더랍디다.

이걸 두 모자가 먹어보란 소리도 없이 눌은밥에 해서 먹는데 그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꽁치만 보면 노상 그 소리를 해요.


한 번은 상한 꽁치를 탄불에 구워내놓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흐물흐물해서 물이 질질 흐를 때까지 생선을 둘 수가 있나요.

소금을 쳐서 놔뒀다 이만하면 오래됐다 싶을 때 구워줬더니 이 맛이 아니래요.

아니, 먹어보기나 했나요? 구경만 했다면서 아니긴 뭐가 아니라고.

그런 맛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요,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맛이지. 썩은 꽁치를 구해오면 구워주겠노라고 호통을 쳤더니 입맛만 쩝 다시는 걸.

우스운 게 이제 와서 그걸 못 먹여 보낸 게 한이 돼요. 아주 홍어처럼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삭혔다가 궈 멕일 것을 갖다가.


그러니까 그 영달이 얘기를 하던 중이잖아요?

두 인사가 알게 된 게 언제 적인지는 몰라도 이 양반이 놈자를 놔가며 사이를 벌인 게 언젠지는 나도 똑똑히 기억을 하기는 해요.

그 이는 우리가 화평동 본가에 신접살림을 살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람이었답니다. 직장이 없어서 낮이고 밤이고, 우리 집 양반이 있고 없고 아무 때나 와서 접골원 이층 입원실 한 칸을 차지하고 누웠다 가고 했거든요.

밥도 숱하게 먹고 갔는데 이 사람이 글쎄 우리집 양반한테 크게 사기를 치고 손해를 입히는 일이 일어나고 만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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