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옥이 혼인을 한 다음 해에 설상가상으로 임신이 되었다.
왜 설상가상이냐 하면 하필 길홍이 실업을 한 해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니던 철강회사가 부산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길홍은 부산으로 직장을 따라 갈 생각은 추호도 안 하고 과감하게 실업자가 되었다.
쌓인 눈 위에 서리까지 내린 형편이라니 듣기만 해도 암담한 처지였다.
눈 자체야 왜 암담한 알이겠는가. 서설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눈이 내리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서리가 덮이면서 그만 엎친 데 덮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야 만 것이다.
용옥의 임신이 그랬다. 아기가 생긴 상서로운 일이 엎친 일이 되고만 것은 길홍의 실업과 시모인 김 씨가 길홍 내외를 내어 쫓은 일이 관계가 있었다.
실상이 그랬다. 말로는 분가라고 하지만 쫓기듯 시가를 떠난 것이 맞았다. 길홍의 실직 소식을 전했을 때부터 보는 시선이 곱지 않더니 용옥이 임신이 되자마자 시모는 큰 아들 내외에게 분가를 하라는 통첩을 했다.
"아, 시방 장개도 갔으이 절로 살아야 할 게 애이요? 애까지 배서 부모 덕을 보고 어찌 살겠소?"
존대인지 하대인지 구분이 안 가는 함경도 사투리로 한참 연설을 늘어놓던 시모는 기어이 길홍 내외를 송현동 언덕배기에 한 칸짜리 방을 얻어서 내보내고야 말았다.
택시를 불러 타고 방을 얻으러 다닌 것은 시모였지만 다달이 사글세는 길홍 내외가 내야 했다.
시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장가를 들었으니 독립을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하필 아들이 실직을 하고 며느리가 임신을 한 때, 그것도 엄동설한에 언덕배기에 있는 단칸방으로 분가를 시킨 일은 남이라고 해도 인정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앞뒤 사정도 모르는 복덕방 영감님마저 날이나 풀리면 이사를 하라고 참견을 할 정도였다.
길홍 내외가 이사한 방은 안채 뒤켠으로 돌아 앉은 북향이었다. 북향인 데다 코앞에 높은 담벼락이 있어서 해 한 줌 들지 않았다. 불을 때도 방 한 구석만 미지근할 뿐 신을 벗어놓은 댓돌은 노상 얼음이 얼어 있는 집이었다.
이사 날에 송현동 언덕이야 말로 설상에 가상이었다. 빙판길에 이삿짐을 실은 구루마가 자꾸 미끄러졌다.
구루마가 못 올라가자 짐꾼들이 일을 멈추고 웃돈을 요구했다. 돈을 더 받은 짐꾼과 길홍이 일일이 짐을 들고 날랐다. 웃돈을 요구할 만했다.
짐꾼들은 여럿이서 살림살이를 언덕으로 굴려 올렸다. 작은 짐들은 끈으로 묶어 질질 끌었다. 용옥의 신접살림이 깨지고 금이 갔다. 그러나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얼음이 구릉처럼 얼어있는 언덕으로 짐을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작은 짐을 이고 올라가던 용옥이 세 번을 미끄러지자 길홍이 용옥을 휑한 방에 앉아있게 했다.
청요리를 시켜 짐꾼들을 불러 함께 먹었지만 용옥은 냉골에 배가 사륵사륵 아파와서 먹히지 않았다.
부엌에 딸린 광에 연탄이 두 장 있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방으로 연탄가스가 들어왔다.
길홍이 길이 미끄러워 못 온다는 미장이를 억지로 불러다 틈을 메웠다.
역시 못 온다는 연탄집에 집주인이 임부가 있어 방이 차면 큰일이라고 역성을 들어주어서 당일로 연탄이 들어왔다.
연탄 백 장이 들어오고 아랫목에 이불을 쌓아놓으니 저녁쯤에는 온기가 돌면서 제법 사람이 사는 집같이 되었다. 화평동 건넌방보다 훨씬 넓고 아늑했다.
한 겨울에 언덕길을 나다닐 것이 걱정이었지만 얼음이야 봄이면 녹을 것이었고 절기가 곧 동지였다. 동지만 지나면 입춘은 금방이리라.
다만 향후로 먹고살 일이 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