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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봄

by 김주음

월급을 받아도 생활비를 안 들여오더니 돈을 마구 쓰고 다닌 것은 아니었는지 월세를 밀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얼마가 있다고 용옥에게 상의를 하는 일도 없었다. 모아놓은 돈이 얼마나 있는지 용옥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길홍은 한 번씩 화평동집 식모일을 보는 순자를 불러다가 시모가 다니는 상회에서 고기며 청과를 사 보내게 했다. 순자는 큰 오빠가 시키는 대로 본가 앞으로 달아 놓은 식료품들을 지게에 실어서 송현동 집으로 보내왔다.


그게 잦아져서 일주일에 한 번은 지게가 송현동집 대문을 드나들었다. 한겨울에 웬 생선이고 청과인지 몰랐다. 뒤켠에 단칸방이 있는 줄 모르는 지게꾼들은 꼭 주인집으로 불쑥 들어갔다. 집주인이 혀를 끌끌 찼고 지게를 다시 지고 쪽방으로 돌아온 짐꾼도 용옥의 눈에는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날도 아닌데 갈비가 짝으로 들어가더라고 동리 사람들이 접골원집 흉을 보던 생각이 났다.


용옥은 순자에게 물건 실어 보내는 것을 그만두라고 일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용옥이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어느새 길홍이 본가로 내려가 시누이나 순자한테 심부름을 시켜놓고 왔다. 그러면 또 저녁에 지게가 들어왔다. 시모 역시 아들 입에 밥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알아도 모르는 척 넘기는 듯했다.


하는 수없이 용옥이 직접 장을 보러 다녔다. 평생 누구에게 돈을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는 용옥인지라 입을 떼는 데 며칠이 걸렸다. 그러나 의외로 길홍은 순순히 돈을 내놓았다. 적잖기까지 했다.

임신한 몸만 아니었다면 빙판이 대수였을까 마는 용옥은 비탈을 살살 내디뎌서 시장을 다녔다. 다녀오면 길홍이 외출이 길다고 화를 냈다.


노냥 집에 있으니 먹기도 많이 먹었다. 쌀 한 됫박이 사나흘이고 센베며 양과자며 사다 놓는 대로 게 거품 사라지듯 했다.

길홍은 보고 배운 게 그런지 물건을 들고 다니는 꼴을 못 봤다. 꼭 지게꾼을 불러 실어 보내라고 했다.

굴레방다리 시장에 가서 화평접골원 이름을 대면 쌀이든 고기든 돈을 안 내도 일단 실어다 줬는데 용옥은 그게 싫어서 꼭 값을 치르고 들고 왔다. 그러면 방에 누워 있던 길홍은 미련을 떤다며 또 화를 냈다.


춘삼월이 되고 얼음이 녹자 길홍은 밖으로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인천공원에 놀이기구를 운영하는 사업을 따내겠다는 것이었다.

아주 허무맹랑한 일은 아닌 것이 마침 공원에 유원지를 만드는 사업이 구상되고 있는 것은 맞았다.

될까 싶었던 그 일이 정말 성사가 되었다. 경찰서장을 지내고 전쟁에 공이 있는 시부의 입김이 있던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적잖은 선납금이 들어갔고 일이 성사되자 함께 해보겠다고 줄을 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돈을 대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몸만 보태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먼저는 시동생인 길남이 저도 할 수 있는데 형에게 내줬다며 술을 먹고 들어와 살림을 부쉈다고 순자가 일러 주었다. 형을 찾아와 자기도 끼워달라고 하는 걸 길홍이 단칼에 잘랐다.


길홍이 동업자로 고른 인사는 하필 화평동 집에서 놀고먹던 친구인 영달이었다. 영달은 돈 대신 운영과 관리를 맡아주는 조건으로 동업자 직함을 달았다.

길홍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참 이상했다.

믿어주는 만큼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색없이 어리숙한 사람인지, 아니면 영달이라는 인사가 원래는 믿을만한 친구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영달에게 책상머리를 맡기고 허드렛일은 다 자기가 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보면 전주는 영달인 줄 알았을 거였다.

사람을 믿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부는 영달한테 맡기고 갖다 줘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영달이가 잘하고 있는데 뭘 나까지 봐. 자꾸 보자하고 의심하고 그러면 소신대로 일을 못해요."

일이 잘되고 있냐고 물을 때마다 길홍이 하는 얘기였다.

"누가 의심을 하래나. 원래 장부를 살피는 일이 당신 일인 걸."

"영달이가 잘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이게 뻔해서 뭘 감추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못 미더워서 하는 말도 아니고 의심해서 하는 말도 아니건만 용옥이 장부 얘기만 하면 길홍은 영달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여기서 더 나가면 성질대로 화를 냈으므로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길홍이 그냥 물색없이 어리숙한 인사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 잘하고 있다는 영달이가 그만 길홍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돈을 착복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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