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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 북소문? 서울에 이런 문이 있어요?

서울시내 4대 산 등정기 #7 낙산으로

by 미니맥스

광화문에서 다시 출발


낙산을 가는 날이다. 광화문에서 시작했다. 원래는 창경궁 정문에서 출발해서 혜화문을 거쳐 낙산을 오르고 동대문까지 가려 했으나 마라톤대회가 있어서 광화문이 통제 중이다. 덕분에 광화문에서 내려 안국역을 지나 창경궁을 거쳐 혜화문으로 가기로 했다.


광화문 월대 공사가 마무리 중이다. 월대는 광화문 앞으로 왕이 행차하는 길이다. 창덕궁 돈화문 앞 광장과 같은 형태다. 공사 때문에, 광화문을 지키던 해태는 대에서 내려와 월대에 다시 놓일 준비를 하고 있다. 땅바닥에 앉아 관악산이 아닌 북악산을 바라보는 해태를 보는 진기한 구경을 마치고 송현(소나무송 언덕현 소나무의 언덕)을 지나 창경궁으로 향한다.


[광화문 월대 공사가 마무리 중이다. 해태상을 월대 앞으로 옮기기 위해 땅에 내려놓았다. 뒷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우리집 작은 강아지다 ㅎ]



낙산 낙타등 같은 산



서울의 좌청룡 낙산. 낙산은 낙타의 봉우리 같다고 해서 낙산이라고 했다는데 남산에서 보아도 북악산에서 보아도 낙타의 봉우리인지 잘 연상이 안된다. 길게 누은 청룡모양이라고 해두자. 낙산은 보통 대학로에서 시작해서 낙산공원으로 오른다. 서울시내 4대 산 중에 가장 낮은 산이라 - 실상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다. 높이가 125미터로 인왕산 북악산 남산에 비해 100미터는 낮고 작다. 나는 성곽길을 따라서 가기위해, 창경궁 북쪽에 위치한 혜화문에서 출발해서 동대문으로 내려오려고 길을 시작한다.




혜화문 북소문 서울에 이런 문이 있었나?


혜화문, 서울의 북소문이다. 북대문이 숙정문, 동대문이 흥인지문, 숙정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는 작은 문 북소문이 혜화문이다. 낯선 이름이다. 창경궁에서 대학로 로터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혜화문이 있다고 하는데 도통 본 기억이 없다. 나름 서울께나 걸었다고 자부하는 나다. 그런데도 혜화문은 본 적이 없다. 네이버 지도를 따라 혜화문을 찾아와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남대문이나 광화문처럼 대로에 노출된 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로변이 아닌 것도 아니다. 대로변에서는 옆으로 대만 높이 보이고 문은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서울대병원 바로 건너편 정도다. 차로 오가면서 성벽만 보았던 그곳이다.


[성북동에 있는 혜화문. 성균관대에서 한성대 가는 큰길 옆이다. 길을 따라가면 문이 위에 있어 성벽만 보여서 찾기 쉽지 않다. 길건너에서 보니 문이 보인다]



[혜화대 망루에서 바라보이는 낙산방향 성곽길.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20분 내로 낙산정상에 이른다.]



[서울의 북소문 혜화문. 오늘 낙산을 오르는 출발점이다. 서울성곽길 2코스 길이 혜화문에서 낙산을 거쳐 동대문을 지나 광희문까지다. 걸어서는 1시간 반정도 거리다.]



성공은 축적이라는데


혜화문을 지나 성곽길을 오른다. 광화문부터 한 시간 남짓 걸었더니 다리가 무겁다. 초반부터 언덕길이라 더욱 그렇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맞다.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오르니 오른 만큼 시야가 트이고 멀리 북한산이 훤히 보인다. 성공은 축적이라는 말을 무거운 다리를 옮길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성곽을 쌓을 때도 그랬겠지... 큰 돌을 아래에 놓고 작은 돌을 위에 올리고 더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렸겠지.



1392년 지금부터 700년 전에 손으로 더 돌들을 다 쌓아 올렸을 텐데 급한 마음으로는 한 구간도 쌓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방마다 성곽구간을 정해서 성곽을 쌓았다. 각자성석이라고 지표석을 보면 영동 음성 등 지역 이름이 돌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역이 담당한 구간이 무너지면 다시 올라와서 수리를 했다. 그렇게 성곽은 한양 도성 성곽인데 작업은 온 나라가, 온 백성이 나서서 한 셈이다.



충북 영동에서 걸어서 보름정도는 되어야 서울에 도착했을 것이고, 농한기에 저 성을 쌓았으려면, 농부들은 마음속에 먹고살 걱정을 성곽보다 높이 쌓으면서, 그래도 언젠가는 그 끝에 닿는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래. 출발하면 닿는다. 이 성곽을 저렇게 5미터 넘게 쌓아간 사람들도 있는데 그저 그 길 따라 걸어가는 것쯤이야 유랑 아닌가. 성공은 축적이다. 하나씩 쌓아가기로...




[성곽길을 따라 낙산 오르는 길. 보상이 확실한 길이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큰길이다. 북한산을 내려보는 풍경이 시원하다.]



열하일기 같은 글을 쓸 수 없다면



기행문으로는 으뜸이 열하일기다. 1780년 영조 때 청나라 사신으로 간 연암 박지원이 쓴 기행문이다. 열하는 베이징이 아니라, 베이징으로부터 25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왕실 휴양지인 더양시이다. 한양을 출발해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하러 베이징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더니 황제는 베이징에 없다. 여름 피서지인 열하에 있단다. 허걱이었을 것이다. 250킬로미터를 다시 가야 한다. 그 길을 다시 떠난 연암은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붓으로 길 위에서 적은 글이다. 내용을 보면 가히 놀랍다.



무엇보다 청을 북벌의 대상이 아니라 북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연한 입장.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다. 청은 오랑캐이니 무찔러야 할 대상이라는 관념은 병자호란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뿐 아니라 그의 아들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 경조 영조 때까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내가 지금 열하일기를 갑자기 얘기하는 이유는 나도 열하일기와 같은 여행기를 적고 싶다는 소망이겠다. 4대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서울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셈이다. 산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열하일기의 형식을 빌어 적을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다. 심지어 연암은 먹을 갈아 붓으로 말위에서 열하일기를 적었다는데 나는 자판을 두드리면 글이 되니 그보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면 재주의 탓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다시 낙산 길을 오른다.



돌 틈 작은 풀...톨스토이의 꿈처럼 피어나길



성벽은 돌이다. 손으로 만져보고 귀를 대어 보아도 돌이다. 이 벽을 쌓았던 사람들의 숨소리 그런 것은 들리지 않는다. 문송인데 공감력이 이리 없어서야 어찌 작가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변명은 가능하겠다. ENTJ에게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감'이란다. 성벽이여 ENTJ인 나에게 공감을 바라지는 말지어다. 대신 나는 빠르게 너를 걸어주겠다. ㅎㅎㅎ.


성벽에 작은 틈으로 작은 꽃이, 풀이 푸르다. 그 작은 틈에 쌓인 그 작은 흙에 뿌리를 두고서는 방울도 안 되는 물을 먹을 것 삼아 살아가는 생명이다. 요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 중이라서 벽 틈의 풀을 봐도 톨스토이 생각이다. 귀족에 대작가에 지주에 모든 것을 가진 그가 마지막은 길거리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자신의 땅은 소작농에게 나눠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회고록을 썼다. 그의 글들에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

나의 종교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까지만 산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성하면서, 살아있는 생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하다는 것이 그의 평생 고민이 도착한, 찾아낸, 인생에 대한 답이었다. 돌 틈 사이 자리 잡은 작은 생명도 사랑하자고 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그 작은 풀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운명이다. 다음에 다시 너희를 볼 때는 더 기쁜 마음으로 우리 다시 만나길.




[낙산 오르는 성벽길. 작은 돌틈에 자리 잡은 작은 풀들. 이 성벽이, 이 돌들이 그들에게는 아마존 열대 우림보다 크다]



낙산 낮아도 전망 맛집!!!! 미안해 무시해서



낙산은 고도 125미터이다. 언덕이라고 놀렸는데 정상인 낙산공원에 오르니 전망이 인왕산 못지않다. 이런 것을 가성비라고 해야 하나 ㅎㅎㅎ 오르는데 힘은 절반인데 전망은 비슷하다. 그래 너도 산이다. 인정한다. 오늘 목적지인 낙산에 이르니, 오늘 남산까지 그리고 다시 이 여행의 출발지였던 서대문까지 완주하자는 목표가 생긴다. 방향을 동대문으로 잡는다. 다시 출발이다.

[낙산정상에서 바라본 서울대병원, 북한산. 야경명소인데 낮에도 참 좋다]


[낙산 공원. 낙산공원에서 보이는 성북동. 그리고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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