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봉우리를 닮은 타락산, 지금 이름 낙산에서 내려와 동대문을 지나 광희문에 도착했다. 이제 남산으로 갈 차례다. 성곽을 따라가는 길이라 장충동까지는 주택가를 가로질러 왔다. 10여분 걸으니 장충체육관이 보인다. 신라호텔 담을 따라 남산을 오른다.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이라 편하다. 걷기만 하면 된다.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낙산 거쳐 이제 3시간이 다돼간다. 살짝 지쳐가지만 날이 덥지 않아 크게 힘들지는 않다. 자 남산으로 올라보자. 예전에는 백범김구 광장에서 시작해서 남산을 오르거나, 한옥마을에서 올라오거나, 하얏트호텔 쪽 남산자연공원에서 올라온 적은 있지만 장충 쪽에서 올라보기는 두 번째다.
다산과 거산
성곽길을 따라 오르니 다산아트센터다. 서울 시내 4대 산을 걷고 있는데, 다산을 보니 다산, 거산이라는 호를 가진 두 인물에 대해 짧게 적고 싶어 졌다.
다산. 가장 거품이 많이 낀 현실도피자.
나는 감히 다산을 이상적 현실 도피자라고 말한다. 위대한 학자이자 저술가이자 정치가였던 다산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불경하기 이를 데 없다. 정조시대를 관통한 인물이 정약용이다. 그의 형 정약전, 정약종. 세 형제는 시대의 인재로 불렸다. 그러나 모두 정조 대왕 서거 이후 귀양을 가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이고, 목민심서가 쓰인 시기이다. 검색해 보니 1762년에서 태어나서 1836년에 생을 마감하셨다.
1900년대 일제 강점기의 원인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서구가 산업혁명으로 보낸 1800년대에 조선은 그만큼의 기술적, 문명적 진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이 생존하시던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미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825년에 영국에서는 이미 철도가 운행되기 시작했을 정도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방적산업이 발전하면서 감자를 재배하던 농지는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바뀌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는 공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경제학의 태두인 아담스미스의 국부론(1776)이 쓰인 지 50년이 지난 때였다.
다시 다산으로 돌아와서, 다산을 현실도피자 이상주의자로 부르는 이유는 전봉준, 또는 그의 형 정약전과 다른 행보 때문이다.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주장하기를 관리들은 뇌물을 받지 말고, 령을 세우고, 청렴하고 원칙적인 관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이런 주장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환곡은 절반이 모래였고, 죽은 자,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기들의 군포마저 농민들이 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 몰리고 있는 살림살이였다. 아전들과 지방 관리들은 세금 수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세금 수탈에 못 견뎌 자살하거나, 스스로 도둑이 되어 산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부지기 수였던 암흑의 시대다. 그들에게 청렴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옳지만 매우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강진에서 이런 여유자 적힌 글을, 책을 쓰고 있었던 그의 주장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현실을 외면한 체 스스로는 옳은 소리를 한 도피주의자다.
다산은 서학을 접한 이였고, 세례를 받은 자였으나 여전히 만민평등의 세상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어려움은 성리학이 바로 서지 못한 탓으로 진단하고 임금 중심의, 왕정 주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그의 저서를 통해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의 형 정약전은 모든 성리학적 저술을 접고, 자산어보라는 물질적인 물고기 총서를 쓴다. 물론 1800년대 후반에 활동한 스탠퍼드 대학 초대 학장인 어류학바 데비드 스타 조던의 어류보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문제는 정신이나 성리학이나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 먹고사는 문제라는 문제의식을 갖춘 정약전이 훨씬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렇게는 못살겠다. 천지인, 만민평등을 외친 혁명가, 동학 혁명을 이끈 전봉준에 비하면 다산선생은,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제한적인, 오히려, 이상적인 지식인이라고 부를 정도면 타당할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다산은 과도한 거품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부동산의 현인 다산: 절대 한양을 벗어나지 말라
다만, 다산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분인듯하다. 유배기간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에는 이런 글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라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부동산, 재테크의 관점에서 그의 식견은 탁월했다. 여전히 틀리지 않은 교훈이기 때문이다.
거산이 만든 독재청산
다산에 이어 거산 김영상 대통령이다. 1992년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전대협은 방황하고 있었다. 김영상 대통령이 되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대협이 싸워야 할 대상, 군부독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92년이 대학 운동의 거의 마지막해이다. 93년 학번부터는 과방에 가지 않았고 오히려 1학년부터 고시를 준비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주류가 되던 시기다. 동시에 학생회장 후보도 찾기 어려운 시대의 시작이었고 머지않아 전대협은 한총련으로 그마저도 대학협의회 같은 이름으로 바뀌어갔다.
92년이 이념운동, 대학운동의 마지막 해다. 그것이 거산, 김영상 대통령이 만든 시대적 구분이다. 그것은 이념에서 이기로 정치 지형이 바뀐 원점이다. 민주대 반민주라는 이념적 구도는 서서히 무너졌고, 이런 흐름은 김대중 대통령으로 완전히 마감됐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부터 민주라는 개념은 이미 시대를 구분하지 못했다. 군부도 사라진 지 오래고 독재도 사라진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정치세력 간의 이기적 진영논리만 남게 됐다. 따라서 현재의 정치는 민주 반민주는 이미 사라진 유령과 같고, 진보 보수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진영 간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 진영 대결일 뿐이다.
신라호텔 반얀트리 맨 발길이면...
다시 길로 돌아온다. 남소문, 남산을 오르는 길은 신라호텔 담장을 따라가는 길이다. 반얀트리까지 길이 고운 흙길이다. 요즘 맨발 걷기가 한창이다. 정원 뒷길이라면 조금 더 정성을 담아 고운 흙을 깔아 맨발 걷기가 가능한 흙길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반얀트리 지나서 남소문
신라호텔이 끝나면서 반얀트리로 접어든다. 직진하면 남소문이다. 남소문은 지금은 없는 문이다. 남산터널 근처에 있었던 문이다는 생각만 가지고 반얀트리를 벗어나 국립극장으로 향한다. 이제 남산 둘레길을 따라 2킬로미터를 오르면 남산 타워다. 오늘 목적지 남산과 남대문 광화문까지 이제 한두 시간이면 도달이다. 힘을 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