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산은 어쩌다 목멱대왕이 되었나?

서울시내 4대산 등정기 #10 남산이다

by 미니맥스

국립극장에서 남산타워로

국립국장에서 남산 순환로를 따라 남산을 오른다. 목멱산. 우리는 북악산을 북산이라거나 뒷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왕산을 서산, 타락산인 낙산을 동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남산만 남산이라고 부른다. 남산도 원래 이름이 있다. 목멱산이다. 목멱산. 목멱산이 왜 목멱산인가 남산 안내 센터에 직원에게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 근처가 조선시대에 목멱동이었대요 그래서 목멱산이라 불렸대요' '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대답이 일리 있게 들렸다. 그러나 궁금증은 여전했다. 왜 목멱동이지? 산에서 돌아와 위키백과 네이버 구글 등 몇 가지 검색으로 내린 결론이다. 목멱산은 앞산의 이두식 표현이다. 즉 앞산산인 표기다. 그래서 목멱산은 앞산이다. 쉽게 얘기하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조선, 이성계의 역사가 더해진다. 목멱산은 조선 이성계 창시자로부터 목멱대왕이라는 지위를 부여받는다. 대왕이다. 그리하여 목멱대왕은 국사당을 모시는 호국과 민간신앙의 거점이 된다. 지금 팔각정이 있던 자리가 국사당 자리다. 지금 그 국사당은 인왕산 선바위 옆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신사를 팔각정 자리에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이성계에 관한 여러 신화나 전설이 있다. 지게로 나무단을 지고 내려오는 꿈이라든가, 그것이 임금왕을 지고 내려오는 꿈이었다는 해몽. 남해에서 신을 만나 임금이 될 상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들이 그렇다. 또 전주 오목대 등 지방에 내려가면 이성계가 기도했다거나, 계시를 받았다거나 하는 전설 같은 얘기들이 전해진다. 고려라는 500년 역사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는 그 정도의 신화, 전설, 등이 총동원되어, 이성계는 하늘이 내린 자라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는 정당성이 필요했음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 시대를 끝내고, 다른 왕조를 연다는 것은 그만큼 큰 변혁이었을 것이므로. 동시에 우리가 500년 고려, 500년 조선이라는 역사, 합해서 1000년이라는 엄청난, 서양사에 쉽게 없는 왕조로 버틴 것을 보면, 한민족이 상당히 인내심이 강하거나,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힘이 강한 보수적이거나 하는 성향이 우리 디엔에이에 새겨져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ㅎㅎ


여하튼 목멱산, 남산은 국사당의 산이었다. 마을에 서낭당, 사당이 있듯이 이보다 격이 높은 국사당은 민간 신들을 모시고, 안전과 번영을 비는 곳이다. 성주신 뒤주신 등 모든 집안의, 마을의 신들을 모셨던 조선 샤머니즘의 공식적 본산같은, 인도의 힌두교 같은 다신교와도 같은 모양이다. 기우제도 지내고, 나라의 기원이 있으면 일종의 굿이나 제사 같은 의식을 행했던 곳이다. 그래서 목멱대왕이고 목멱산이고 그랬던 것이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격을 낮추기 위해 남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주장이다.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북쪽, 동쪽의 서울 모습. 정겹다.]



남산 순환로 2킬로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니 다리가 제법 아프다. 올라가는 8001번 버스 뒷모습을 보는데 '나도 태우고 가' 외침이 자연스레 나온다. 푸념을 뒤로하고 조금 더 언덕을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남산체육회 안내판을 따라 산으로 오르니 남산 성곽긱을 만나게 된다. 순환로를 따라가면 엔타워까지 1.7킬로미터, 성곽길을 따라가면 2킬로미터다. 이제 다리가 제법 무겁기 때문에 약간의 고민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은 성곽길이다. 시작부터 후회다. 언덕길이다. 그러나 이 후회는 100걸음도 지나지 않아 금방 잊힌다.




속 깊은 산 남산

산으로 들어오니 순환로를 따라 걸을 때 몰랐던 남산의 속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번 남산에 왔지만 남산은 참 멋이 없는 속이 없는 밋밋한 남자 같은 산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아니다. 남산의 남쪽 안쪽으로 성곽길을 향해 들어오니 남산은 여자산이다. 마음이 깊은 산이다. 마음이 복잡한 산이다. 길은 갈래가 많고 느낌이 따뜻하다. 그리고 왠지 변덕이 잦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엄마 같은 남산

낙산을 걸어오면서 꼬맹이 산이라는 느낌이다. 아주 작고 귀여운 동산. 그런데 남산에 이르니 엄마 같은 산이다. 따뜻하고 속이 깊다. 가만, 나머지 인왕산과 북악산을 돌이켜보면, 북악산은 우뚝 솟은 것이 아빠같이 강한 산이다. 인왕산은? 큰 애같이 듬직하면서도 바위가 거칠거칠한 중2를 지내는 큰 아이 같은 산이다. 그렇구나, 하나의 가족으로 세팅이 된 산이구나. 엄마산 남산, 아빠산 북악산, 큰 아이산 인왕산, 막내 낙산. 그래서 안산을 네 개의 수호산으로 넣지 않고 작고 볼품없는 낙산을 넣은 것이구나. 남산에 이르니 낙산이 시내 4 산에 들어간 이유를 알게 된다.




핸드폰이 끝났다

장충단으로 이어지는 남산 성곽을 따라 엔타워로 오른다. 장충단 공원은 장충단이 있던 터이다. 장충단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국립묘지 개념이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있지만 말이다. 한옥마을, 남산타워로 이어지는 갈림길을 지나고 엔타워 길로 향하니 곧 엔타워가 나타난다. 남산 정상 부근이다. 핸드폰을 보니 배터리가 1%다. 남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큰일이다. 안내소에 들러 왜 남산이 목멱산인지 물으면서 폰도 충전을 했다. 15%다. 이제 다시 남산 정상을 향해서 출발한다.





남산 정상을 지나 남대문으로

남산 봉수대, 국사당 터를 지나 백범김구광장으로 내려간다. 남산 정상에서 보면 서울은 꽤 낭만적인 곳이다. 네 개의 산에 둘러싸인 작은 터. 런던이나 도쿄나 베이징 파리 프라하 심지어는 뉴욕, 워싱턴 까지 모두 평지다. 산으로 가로막힌 곳은 없다. 누구는 큰 산 4개를 가진 자연친화적 정원의 도시라고 하는데, 뉴욕이나 런던이나 도쿄를 가본 사람은 금방 안다. 그것은 매우 국뽕이 들어간 합리화라는 것을.... 그럼에도 남산에서 바라본 가을의 서울 풍경은 꽤 낭만적이다. 부정하기 어렵다. 산으로 산으로 첩첩 히 둘러싸인 강원도 못지않게 산악지대라는 느낌도 들지만, 여기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은 살다 보면 기대하지 않은 실망을 하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히 명제를 때때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살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남대문에서 다시 끝난 핸드폰

백범광장을 따라 남대문으로 내려왔다. 15% 충전한 핸드폰이 다시 끝나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대문 사진을 찍고 핸드폰은 운명했다. 바람은 오늘 5시간 여정의 시작이자 끝인 광화문 인증사진을 찍는 것이나, 핸드폰은 기계적으로 정해진 양만큼 쓰이고 방전됐다. 문득 내 삶의 배터리는 몇 퍼센트정도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지만 나는 기계가 아니다. 마음먹기 달린 거 아닌가? 동시에 나는 생명일 뿐이다. 유한한 수명을 가진 개체이자 유기물인데 생물학적 수명, 배터리의 양은 내가 부정할 수 없다... 50% 이하일까? 약간의 두렵거나 무거운 마음으로 광화문을 향한다.






조선일보 그리고 박헌영

광화문을 향하다 보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사 건물이다. 한 때 언론사에 근무했던 나로서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빌딩은 아니다. 그러에도 오늘은 조선일보를 지나면서,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조선노동당의 원조격인 조선공산당의 서기였고, 소련이 지명한 여단장 출신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패권 싸움을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 운동의 리더 박헌영. 그리고 6.25를 김일성과 함께 주동했으나, 결국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사나이 박헌영.


우리는 북한을 이끄는 정당이 북한노동당인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을 보라, 공산당이다. 당연히 북한도 코민테른에 따라 공산당이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공산당이 아닌 노동당인 것은, 김일성의 공산당의 정통성을 박헌영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일군 조선공산당의 북한 지소를 맡았던 김일성 일당이 공산당이 아닌 노동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과 공산당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으나, 부인 자식,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몰락하고, 결국 김일서에게마저 철저히 버림받은 박헌영이라는 사내.... 그가 일했던 곳이 동아일보 조선일보다. 그리고 그의 독립운동, 공산운동 동료들을 채용해 준 곳이 두 신문사이다. 그때는 두 신문사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지식인들의 근거지였다. 그 덕분에 일제에 의해 폐간되기도 하고, 구속된 박헌영을 풀어주는 대가로 정간을 당하기도 한 역사를 가진 신문사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의 가장 앞자리에 차지한 신문사가 됐다. 역사는 전진한다. 전진이라는 이름 속에 변화를 요구한다. 없던 자가 기득권이 된다. 기득권이 된 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포장한다.




다시 광화문이다

마침내 다시 광화문이다. 핸드폰이 죽은 까닭에 오늘의 여정을 기록하기 위해 동아미술관 카페에 들렀다. 펜을 빌려 냅킨에 간략히 포인트들을 메모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해서 1시다. 대략 5시간 정도 걸은 세이다. 서울이라는 곳이 작은 터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5시간, 한나절이면 전체를 둘러서 걸을 수 있는 곳이다.



keyword
이전 09화서울의 두 큰 산 다산과 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