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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겨울 Dec 29. 2023

사랑의 역설은 고양이에게 닿는다

 지난 7월 여름의 절정이 오기 직전에 고양이를 분양받아 키우고 있다. 이름은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결'을 길게 늘여서 '겨울'로 지었다. 성의 없지만 앞으로 잘 키워보겠다는 마음을 담았었고 이름에 걸맞게 새하얀 고양이로 데려왔다. 빈약한 왕래에 비해 유독 마음이 가는 아는 동생 M의 시에서 착안한 이름이기도 했다. '사랑, 사아-아랑, 사랑. 평생을 못다 읇조릴 아득한 음절이 당신의 이름이었던가. 아마.' 시의 맛을 모르는 내가 아는 가장 절절하고 애닳는 시였다.      


 대전의 한 펫샵에서 단번에 내 모든 것을 사로잡았던 너의 앞에는 나와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줄서있었다. 어찌나 노심초사하던지 혹여나 차례가 오지 않으면 바짓단이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고 저 녀석 말고 자신을 데려가달라는 수많은 고양이들의 아우성에 귀를 틀어막고는 조수석에 너를 태웠다. 브리티쉬 숏헤어인줄 알고 분양받았던 너는 유난히 털이 길었고 풍선에 비빈 터럭마냥 삐쭉거렸다. 새끼 때 길다가 자라면서 짧아지겠거니 했는데 뒷다리의 털은 변이 묻어 잘라줘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겨울에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새하얗던 너의 털에는 도로변에 쌓이다 사람과 차에 눌려 납작해진 눈처럼 점차 회색빛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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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하면 뺨을 부비고 고개를 쳐올려 나만 바라봐주는 너는 지금도 한참동안 방안을 쏘다니는 너는 내 주의를 빼앗고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사고를 칠까, 뭘 잘못 주워먹지는 않을까, 나를 부지런하게 만든다. 너로 인한 노동으로부터 잠깐 숨을 돌릴 때, 언제 말썽을 부렸냐는 듯 뻔뻔하고 우아하게 다가와 내 손목에 턱을 괴고 잠을 청한다. 그런 너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너의 미간부터 꼬리까지 조심스레 쓰다듬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혹여나 얕은 잠을 깨울까 긴장하여 손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멈출 생각이 없는 축축한 손을 미늘이 잔뜩달린 혀로 그루밍 해주는 것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문득 궁금해졌다. 


 반복된 수평운동으로 팔이 저려오기 시작할 무렵, 그제서야 항문 주위에 묻은 고약한 잔변이 보인다. 고양이는 주로 단백질 위주의 사료를 먹어 대소변의 악취가 심한 편이다. 또 비슷한 성분의 간식(일명 츄르)과 피곤에 절은 주인의 여가시간이 주식으로 삼다보니 향기가 날리 만무하다. 나는 이 지독한 것을 달고 활보했을 너의 자취를 엎드려 따라다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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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증의 동거가 다른 계절을 세 번 맞이했을 즈음, 나는 너와 닮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뻔하고 닳아서 뭉툭해진 말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사이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나. 너의 털을 입고(하루종일 뱉는다.) 변을 모래로 묻어 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거나, 물거나 할퀴지 않고도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 낯선 이를 경계하되 무례하게 굴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인간 세상에서 고양이로서 살아가는 방법들을 어미처럼 일러주며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너의 손톱을 삼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를 들이고 나의 공간과 시간과 마음을 너에게 내어주며, 이제는 너의 뺨에 내 손을 부빈다. 너만을 바라보고 행복 이외의 감정을 모르기를 바란다.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인 너를 외로이 두고싶지 않아 퇴근길을 서두른다. 이런 나는 지금 '사아-아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 지금 내가 하는 사랑은 사람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보를 양보로 여기지 않게 되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피워낸 꽃이다.      

 그래서 나는 일과 사람으로부터 온 삶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분양을 결심했던 나에게 종종 책망이라는 화살을 쏜다. 당연하게도 장난감을 삼키거나 종종 설사를 하기도 하고 겨우 잠든 내 얼굴을 밟고 유유히, 엉덩이만 보이며 사라지던 당시의 너는 짐이자 퇴근 후 발을 끌며 집에 온 나를 향한 조롱이었다. 피로의 도피처가 주는 배신감에 한동안은 너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고심 끝에 휴직을 결심하고, 여전히 여유는 좀처럼 되찾을 수 없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늘며 모자란 마음을 떼어줄 수 있게 되었다. 너가 먹는 밥이, 너가 싸는 똥오줌이, 너의 발톱과 수염이, 너의 눈 색깔이 궁금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새벽의 어스름한 푸른 하늘같던 너의 눈에는 어느새 초록이 섞여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너의 눈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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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넷보단 셋이, 셋보단 둘이, 그리고 혼자가 더 편한 사람이다. 그 누구에게도 내 것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싶어하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을 좋아하도록 잘못 설계되어 필연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패로 여겼던 사랑(들)에 기인한 마음의 방어기제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외면하고 무욕과 무성애를 지향하도록 만들었다.      

 숱한 이별에는 한 방울의 탓도, 잘못도 섞이지 않았으며 지극히 예견된 일이었음을 알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뉘였다. 아주 탁하고 뿌연 바다의 흐름에. 그 몹시도 짜고 무거운 물에 나의 몸은 반쯤 잠겨있지만 결코 가라앉을 일은 없다. 일개 ‘피이별인’은 이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슬픔보다 밀도가 낮아서 그렇다. 나는 단지 배가 하늘을 바라보도록 누워 같은 방향으로, 나보다는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언젠가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게으름피우지 않고 자전하고 있을 지구에서 구름은 곧 시간이다. 


 뭍에서 구름보다는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이상형을 묻곤 한다. 그럼 나는 어느 날엔 쌍커풀을 만들고 또 다른 날엔 쌍커풀을 지우며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마저 흘러간다. 단순히 흐르는 물에 저항없이 몸을 맡긴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줄 암초에 옷자락이라도 걸리기를 바라며 사지를 휘적대고 있다.     


 그렇게 수년을 흐르다 배 위에 너를 얹었다. 배 위에서 똬리를 틀은 너는 나와 같이 흐른다. 그런 너를 보며 나는 종종 사랑의 속성과 본질을 사유해보지만 어떤 단어와도, 감정과도 치환하지 못한 채 끝난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다. 그리고 너는 유일하게 나의 '사랑해'를 듣는(들어본) 살아있는 것. 여전히 입에 붙지 않아 더듬대지만 의식해서 한 글자씩 꾹꾹 눌러 발음해본다.      


 오늘도 너의 유연한 귀는 늘 나를 향해있고 귀만은 잠에 들지 않은채 나의 발소리를 쫓아다닌다. 그러나 내 말을 이해하긴 하는건지 여러 목소리로 불러보아도 도통 올 생각이 없어보인다. 나는 그런 너를 무애(撫愛)한다. 엉덩이를 바닥에서 떨어뜨린 채 쪼그려 앉아 너를 쓰다듬는 나의 목에 부드러운 꼬리를 감아주기를 바라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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